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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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禁標(14)

"성균관에서 쫓겨나다니요?"

"성균관을 원각사로 옮긴다는 말도 있고, 태평관으로 옮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균관이 대궐 후원에 가까워서 임금님께서 노시는 것을 엿본다고 해서 옛 성균관을 없애고 새로 짓는다고 그러지요."

조보(朝報)가 민간에 배포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나 소문이 빠른지 벌써 민간에서 알고 수군수군하였다.

의정부와 육조, 한성부에서는 성균관을 새로 지을 터를 여러 곳 답사한 후 동대문 밖 가은군(加恩君)의 집 동네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왕은 화원(畵員)을 보내 그곳의 지형을 그림으로 그려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일단 성균관 관원과 유생들을 태평관으로 쫓아 버렸기 때문에 성균관을 옮겨 짓는 일 따위는 그다지 급하지 않게 생각하고 미루어 두었다.

그 대신 대궐 주변에 몰려 있는 인가를 철거하고 차츰 도성 밖까지 이른바 원유라는 이름의 놀이터를 겸한 사냥터를 넓게 점유해 나갈 궁리에 몰두하였다.

<내가 소교(小轎)를 타고 친히 나가서 철거해야 할 인가를 살피려 하노라. 동소문(東小門) 안 흥덕동과 사섬사동 여염 사람들은 모두 피하여 숨어서 집에 있지 못하게 하고, 부장(部將) 5원(員)이 군사 백명을 거느리고 주인이 임시로 비운 집을 지켜 도둑을 막게 하라.>

교군 네 사람이 메는 작은 옥교가 등대되었다.

왕이 임금의 체통에 걸맞지 않게 작은 옥교를 타고 나간 것은 인가가 밀집해 있는 동네의 골목길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려는 의도에서였다.

동리의 길이 좁아서 수리도감, 병조, 한성부, 승정원의 당상과 낭청들은 동네 둘레 밖의 대로에 대명(待命)하여 서 있고, 내시 김자원 등 수십 명만이 의장(儀仗) 없이 골목길로 겨우 호종을 하였다.

주인들이 피하여 숨고 군사들이 대신 지키고 있는 인가들은 지붕이 썩어 내려앉고 벽이 헐어 욋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창호(窓戶)가 넝마같이 험하여 한눈에 궁상스런 민생(民生)임을 왕은 알 수 있었다.

그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집은 철거하되 포곡(布穀) 같은 것으로 구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흥덕동에 한 늙은 아낙이 몸이 성치 못하여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가장(家長)을 잡아서 죄주라 명하고 또 사섬시동에서는 해산하느라고 진통 중에 있는 젊은 아낙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가장을 잡아서 죄주라고 명령하였다.어떤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도 모두 피해 숨어 있으라는 어명을 거역한 죄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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