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림 법주사 교무국장

'인생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닮는다'고 한다. 행복하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답도 문도 없는 것이 오히려 그 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의 시작은 욕심이며, 욕심이 없다면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되기 때문에 산다는 자체가 욕심이며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시작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존재의 가치가 없어진다면 삶의 의욕이 상실될 것이고, 바람이 상실되면 타락하여 인간의 절대가치를 잃게 되고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면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으로 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답도 마치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자와 같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인가?

이미 열반으로 입적하신 석주 큰스님의 생전 말씀 가운데 "현재에 만족을 느낄 때가 잘 사는 것이오, 현재에 만족을 아는 자가 큰 부자인 것이다. 현재에 만족을 모르는 자는 부자라도 가난함과 다름없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오, 질투와 원망과 분함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오, 강제와 탐욕과 구속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오, 마음에 흡족할 줄 아는 이가 가장 잘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은 자신 스스로가 만족함을 안다는 뜻이겠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만족은 어디서 생기는가? 우리 주위를 보자. 어디 만족할 만한 곳이 있는가! 세상은 변했다. 기회주의가 만족하는 것이요, 빼앗는 것이 만족하는 것이요, 남을 험담하는 것이 만족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만이 능사가 되는 세상에 만족해야 한다고 변하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어 슬프게 하는가!? 좌절의 마음속에는 먼저 세 가지 무서운 독(三毒)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삼독을 가장 행복한 마음의 장애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인데 삼불선근(三不善根)·삼구(三垢)·삼화(三火)라고도 하는데 탐욕(貪慾)·진애(瞋碍)·우치(愚癡)로서 흔히 '탐·진·치'라 한다. 탐(貪)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절대의 집착, 진(瞋)은 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혐오·불쾌 등의 감정이다. 이 둘이 정적(情的)이라면 치(癡)는 지적인 번뇌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네 가지 성스런 진리(四諦)나 우주의 여실한 실상의 연기(緣起) 등을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또 치는 12연기의 최초에 위치하는 무명(無明)과 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강한 집착에 의해 바른 도리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이나 분별을 일으켜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된다. 이상의 삼독의 번뇌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할 경우에도 항상 그 기초가 될 만큼 두루 언급된다. 따라서 삼독은 인간의 숱한 번뇌를 압축한 상징으로써의 의미를 지닌다.

욕심! 그것이 가진 자의 답이요, 없는 자의 문일 것이다. 가진 자에게 무조건 내놔라 할 수 없고, 갖지 못한 자에게 무조건 참으라 하여 비움의 미(美)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일 것이다. 윤리가 상실하고 믿음이 없어지는 오늘날 냉혈 절대 자본주의 앞에서 종교도 도덕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이미 종교도 빈부의 격차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봄날이 오더니 어느 사이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무더웠던 여름이 사라졌다. 가을꽃과 함께 더욱 쓸쓸해진다. 마음은 오늘날 이 시대의 현실에 다급해지는 생존권의 목숨 내던진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할 말 있겠는가! 더욱 깊어져가는 가을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꾸 밖으로 내몰리게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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