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싣는 순서
ⓛ빛바랜 대전지역 근현대사 건축물 진단
②잃어버린 역사의 대변인들
③위기의 충남도청사
④국외 근현대사 건축물 활용 실태
? <원형 복원사례, 이축 보존 사례 중심>
⑤국외 근현대사 문화유적 활용 실태
? <개수보존 사례 중심>
⑥근현대사 건축물 활용을 위한 고민과

대전은 역사의식이 희박하다. 100여 년 전 일제에 의해 철도가 생기면서 형성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대전시가 발간한 '통계로 본 대전 50년'에 따르면 1931년 총독부령(제103호)으로 대전면이 대전시로 승격된 것으로 나온다.

그만큼 대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도 적은 편이다. 대전지역의 근대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다. 대전의 근대 건축물은 상대적으로 짧은 성립연대와 일제 치하라는 암울했던 시대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폄하되어 왔다.

또한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팽창으로 인해 근대 건축물의 가치는 절하됐고 심각한 훼손과 파괴의 위험을 겪으며 문화와 역사의 단절이라는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방치한다면 복원이나 복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충청투데이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대전지역 근대건물의 실태와 해외의 근대건물 활용 실태를 사례 중심으로 6회에 걸쳐 점검해 보고 활용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일제강점기, 철도 그리고 대전

100년 전. 대전은 도시가 열리기 이전인 한촌(寒村)에 불과했다. 철도가 지금의 대전지역을 관통하면서 대전의 역사도 시작됐다.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 대전의 태동을 가져왔고, 호남선의 통과가 대전의 본격적인 도시 역사를 쓰게 했다.

좀 더 역사적으로 접근한다면 1904년 대전역이 준공되고, 다음해인 1905년 개통되면서 대전은 역사다운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호남일보사가 발행한 충청남도사에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간선(幹線)인 경부선 철도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들 철도공사 관계자인 일본인이 대전에 들어와 거주한 것이 일본인의 대전 거류의 시초였다. 1904년에는 우선 대전에 수비대(守備隊)를 설치하고 또 '한성영사관경찰 대전순사주재소'를 설치하는 등 무력을 투입하고 대전역을 신설해 일본인이 입주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9년경 대전지역에 머물던 일본인 인구는 2482명에 달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아마도 대전이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 최초의 주민은 일본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주로 대전역 인근의 본정통(本町通·현재 원동지역), 춘일신지(春日新地·현재 중동지역), 영정(榮町·현재 정동지역)에서 일본식 거리를 이루고 살았다. 이후 1910년대 초에는 일본인들이 역전에서 가부키를 공연했고, 1915년경에는 대전천의 목척교를 건너 형성된 목척리와 지방법원 대전지청을 중심으로 은행동과 선화동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대전역과 충남도청을 잇는 중앙로의 탄생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일본인 중심으로 시작된 대전의 도시 역사는 1920년대 중반 한국인들이 자리를 잡으며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본인들과 초기 대전에 정착한 한국인들의 흔적은 일부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일제가 한국의 효율적인 지배와 수탈을 위해 지어진 건물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선 대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자녀를 공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세운 삼성초등학교이다. 줄곧 학교 건물로 쓰이다 1992년 한밭교육박물관으로 탈바꿈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역사를 가르치던 장소가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교육 역사를 가르치는 장소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도 남아있다. 동구 인동에 위치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대전지점이다. 동척 대전지점은 일제의 위세를 등에 업은 국책회사로 조선 민중을 착취한 식민지 수탈기구였다.

1921년에 세워진 동척 대전지점은 해방 이후 체신청과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다가 1984년 개인에게 매도됐다. 현재도 87년 전 그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아픈 나이테로 남아있다.

◆ 대전역사를 품은 충남도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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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온 충남도청사는 대전의 질곡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일제치하 동안 충남의 정치·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였고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으나 2013년 홍성으로 청사가 이전함에 따라 건물 활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전역과 마주보고 있는 충남도청사(중구 선화동 287)는 대전의 질곡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충남도청사는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왔다. 1931년 1월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코 마코토가 총독부 회의실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을 발표했다.

이후 공주 지역민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6월 기공식을 거쳐 12월 상량식을 해 다음해 8월 총 35만 9000원의 공사비로 준공됐다. 설계는 조선총독부 영선계가 맡았고, 스스키 겐지로가 시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철근 콘크리트 벽돌조 2층의 외장타일로 마감된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798㎡의 이른바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1904년 대전 역사 건립에 이어 정면에 충남도청사가 완공됨으로써 현재 중앙로 1.1㎞ 구간은 대전의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됐고 이들 건축물 사이에는 수많은 근대 건물이 들어섰다.

일제 치하 동안 충남지역 모든 정치, 행정, 경제, 문화가 도청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에도 도청사는 그 기능을 잃지 않고 대전의 역사와 함께 숨쉬어 왔다. 당초 2층으로 준공된 이 건물은 제2공화국 시절인 1960년에 3층(면적:2303㎡, 구조설계:충남대 이창갑)을 넓은 창을 낸 모임지붕의 형태로 증축했다.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 6월 27일부터는 정부가 머물기 시작했고, 7월 1일에 대통령이 떠난 후에도 16일까지 임시 중앙청으로 사용된 바 있다. 전쟁 후에도 충남도청사는 국가 재건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대전에서 가장 번창했던 중앙로 일대의 크고 작은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원죄에 시달리는 근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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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은 상업시설로 바뀌면서 옛 모습을 상당수 잃어버렸다. 한전 대전보급소와 옛 삼성초등학교 건물은 개·보수를 통해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는 등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근대건축물 전문가인 목원대학교 김정동 교수가 쓴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에 따르면 대전을 대표할 만한 근대 건축물은 166개가량 된다. 현존하는 대전의 근대건축물은 옛 동양척식㈜ 대전지점(1912년),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성당(1921년), 뽀족집(1929년), 충남도청(1932년), 대전공회장(1936년), 목동성당(1919년) 등 모두 40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동구 인동의 동양척식 대전지점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내부와 외관이 바뀌었다. 옛날 대전역사와 중부경찰서, 일본헌병대 대전분소, 대전형무소, 충남여고, 원동초등학교, 조선운송 대전지점, 등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70∼1980년대 개발 논리에 밀려 대부분 근대건축물들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특히 일부 근대건물의 경우 일제 시대의 양식을 담고 있다거나 일본인들이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건물이 지닌 문화재적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 채 무참히 허물어졌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주된 의견이다. 기념할 것은 기념하고 기록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헐어버린다고 오욕의 역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 논리와 가치 평가 절하로 인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건물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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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중구 대흥동에 위치한 등록문화재 100호인 옛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건물이 지난달 26일 대전창작센터로 탈바꿈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대전은 현재 원도심을 중심으로 수 십여 곳에서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어 종합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으며 가장 좋지만 어렵다면 이전 복원을 계획해야 한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최소한 문화재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남겨야 한다. 근대 건축물을 비롯한 근대 유산의 활용에 대한 판단의 절반은 후손들에게 있다.

글=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사진=신현종 기자 shj000@cctoday.co.kr

본 시리즈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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