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그리움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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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그리움이 머무는 곳
  • 충청투데이
  • 승인 2008년 09월 24일 19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8년 09월 25일 목요일
  •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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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중 타임건축사사무소 건축사·시인
자연정원이란 말이 있다.

어느 일본 학자가 법주사 일대를 보고 "그게 바로 여기로구나" 하고 감탄하며 쓴 글을 본적이 있다.

멀리 문장대 관음봉이 보이고 옆으로 산 줄기가 내려온다. 계류는 사찰 동쪽에서 내려와 소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풍수에 어두운 내가 봐도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나오는 최귀지(最貴地)가 아닌가 한다. 

아련한 그리움이 있는 것일까. 한 해 여러 번 식구와 법주사를 들린다. 철따라 변하는 풍경이 좋아서 그런지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법주사에 대한 추억

법주사는 호서제일 가람답게 국내에서 유일한 목탑과 가장 큰 대웅보전, 청동대불이 있고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또한 사찰 공간배치가 시원하다. 비움과 충만의 조화라 할까. 장차 중생을 구원할 대 선지식이나 미륵부처님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  

경내의 문화재 중에 나에게 가장 친근한 것이 팔상전이다. 팔상전은 조선식 결구(結構)의 목탑이다. 기단은 신라 창건 시 모습이다. 옛 법주사 전경도에 보면 팔상전 지붕의 층별 수직 경사가 지금보다 현저히 적어 고준한 모습이다. 일본 법륭사의 5중탑과 유사하다고 한다.

1층 기둥의 상부는 주심포의 형식이나 상층부는 다포형식이다. 각 층마다 지붕의 처마 형식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위의 산과 닮아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한참보다 보면 어딘지 빈듯하고 언제나 마주치는 갖은 풍상을 겪은 얼굴이 연상된다.

팔상전의 목구조를 보면 목탑의 구조형식보다는 조선식 건물의 구조형식을 따랐고, 최상층은 귀틀식 적층공법을 사용하여 횡력에 강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심주와 사리장치가 있어 탑으로 분류된다.

팔상전 해체 복원 시 나온 상량문을 보면 정유재란 시 왜군에 의해 불탄 것을 전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법주사가 승군의 본부가 되어 왜군의 방화로 피해를 입었다. 사리장치가 1968년 해체 시 수습되었고, 황룡사의 사리장치와 같은 형식이라 한다.

그 때 사리 80립이 나왔고 동국대 박물관에 잠시 보관되었었다가 어찌 되었는지 기록에 없어 더 알아봐야 겠고, 일부 사리장치는 다시 제작하여 봉안되었다고 한다.

고려사 기록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피난 시에 속리사에 들려 통도사에서 가져온 가사와 사리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사리인지 문화재연구소의 수리공사보고서에 학술적으로 확인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공민왕이 본 통도사의 그 사리라면 그것이 여기에 봉안되었다면 여기가 적멸보궁이오 금강계단인데 하는 아쉬움이 인다.

사라진 사찰 문화재들

역사적 문화재로 하나 밖에 없는 목탑의 화재에 의한 손실이 염려된다. 일전의 숭례문의 방화소실 사건 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황룡사 목탑도 몽고 침입 후 불타고 방치되어 폐허로 남아있다. 다시 복원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저절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산호보전의 장육존상도 대원군이 녹여 경복궁 짓는 비용으로 쓰고 왕권 신장에 전력하다가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자리에 전 박정희 대통령 등의 시주로 시멘트 미륵대불이 들어서고, 다시 고 정주영 회장 등의 시주로 현재의 청동미륵대불이 세워진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같이 사찰 문화재는 지키려는 의지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려는 비상한 대중의 노력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