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본사고문

음력으로 8월 17일, 그러니까 지난주 화요일은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제삿날이다.

사실은 이날이 제삿날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부여군이 술잔을 부으며 제를 올리는 데는 사연이 있다.

오래 전부터 부여군은 중국 낙양에 있는 북망산 일대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필자도 2004년 겨울 계룡장학재단 이인구(李麟求) 이사장과 함께 낙양을 방문, 그곳 시장을 만나는 등 의자왕이 묻힌 곳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당나라 왕족이 묻힌다는 북망산 자체가 황폐화되어 도무지 무덤같은 것을 식별할 수도 없거니와 중국 정부가 우리의 이와 같은 '역사접근'을 차단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때 북망산 입구에 서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의자왕을 추모하며 묵념을 올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여군은 이런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2000년 9월, 북망산에서 유골 대신 흙을 퍼다 부여읍 능산리에 묘를 쓰고 의자왕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에게 잡혀간 660년 음력 8월 17일(양력 9월 3일)을 제삿날로 정한 것.

세상을 떠난 날도, 어디에 묻힌 지도 모르는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

의자왕이 잡혀 갈 때 100명의 귀족, 1만 3000명의 포로도 함께 갔는데 그중에는 백제 왕자 융(隆)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의장왕의 비극 가운데 가장 불행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삼천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임금,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나쁜 임금, 마치 로마의 네로 황제처럼 그렇게 폭군으로 후세에 비춰진 것이 아닐까?

서울의 한 중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백제'하면 떠오르는 것을 말하라고 하니 70%가 '삼천궁녀'와 의자왕이라고 대답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삼국사기와 구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가 망하고 500년 뒤에 씌어진 것이 삼국사기이다. 더욱 이 책을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누구인가?

신라 왕실의 후예다. 그리고 당시 경주지역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날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는데도 오류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500년 세월이 흐른 후의 기록이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까?

더욱이 백제와 대치되는 경주의 세력가, 백제 패망을 합리화시켜야 할 신라왕실의 후예가 쓴 기록이라면 얼마만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적국이었던 당나라 역사책에는 의자왕을 공자의 제자로 효심이 극진했던 증자(曾子)에 비유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했으며 '용감하고 결단력을 갖춘 임금'으로 평가했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 재위기간, 신라로부터 빼앗은 성이 무려 100개가 넘는다. 그렇다면 호색에 빠진 임금이 이런 국위를 떨칠 수 있고 적국의 역사서에 '증자'로까지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오히려 백제가 망한 것은 이와 같은 위협적인 백제 의자왕의 세력확장에 불안을 느낀 신라가 외세(唐)를 끌어들였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신라가 우군이 되어줄 필요를 느낀 당나라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때문이 아닐까?

기가막힌 일은 이와 같은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정세변화는 1300년이 흐른 지금에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불행하게도 백제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패망한 나라여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이 백제를 뜨겁게 흠모하고 있음은 우리를 반성케 한다.

정말 이제부터라도 '백제 바르게 알기'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의자왕 추도일을 보내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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