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기업을 찾아서]신광바둑
해방 직후부터 60여 년간 바둑알을 만들어 온 창업자 허복래(76) 신광바둑 회장에 이어 셋째 아들이 허윤구 대표가 가업을 잇고 있는 신광바둑은 하루에 4∼5톤 분량의 바둑알을 찍어내 생산량 면에서 세계 최대 업체로 부상했다.
강원도 횡성 출신의 허 회장은 부친을 따라 대전에 이사온 후 갑자기 기울어진 집안 형편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갓 마친 1946년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단추공장 '대전초자'에 들어간다.
어렸지만 성실한 성격에 사소한 하자라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았던 그는 공장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공장장에 오른다. 만약 제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인부들을 동원해 밤을 세워서라도 다시 제작시키면서 대전초자는 관련업계에서 가장 품질 좋은 단추를 생산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 무렵 일제 바둑알을 써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고 조남철 국수가 바둑알을 만들 수 있는 관련 업체를 수소문하며 단추공장이 몰려 있던 대전까지 내려왔다가 대전초자를 방문하면서 바둑알과 허 회장의 운명적인 인연이 맺어진다.
"우리 공장에서 만들어 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바둑알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결국 내가 한 알 한 알 손으로 만들었어요. 우리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면 조 국수가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 팔았어요. 일생을 현대바둑 보급에 헌신한 조 국수가 우리나라의 바둑알 보급에도 앞장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당시 조 국수는 솜씨가 뛰어난 허 회장을 가르쳐 '바둑 도사'라며 치켜세웠다.
허 회장은 플라스틱의 보급으로 유리단추 수요가 급감하자 바둑알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열아홉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신광초자'를 설립했다.
때맞춰 바둑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문량도 증가해 수제품으로는 수요를 맞추기 어려운 지경에 직면한다.
허 회장은 결국 서울 공대 출신의 전문가 도움으로 밤샘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81년 바둑알 자동화 기계를 개발하면서 국내 바둑알의 대량공급 시대를 열었다. 조훈현 9단,서봉수 9단 등 스타 프로기사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신광초자도 호황을 누려 매달 5톤 트럭 10대 분의 바둑알이 판매되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타 제조업체들은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바둑알 시장은 또 한 차례 호황을 맞이한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퇴직자들이 기원으로 몰리면서 바둑알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허 회장은 중국 지난시에 공장을 세워 초기에 많은 수익을 거두지만 환율 급등으로 3년 만에 중국 공장을 철수하고 만다. 하지만 허 회장은 벙커C유를 때워 연기가 많이 나던 기존 제작방식을 탈피한 전기로(電氣爐) 방식을 직접 고안해 내면서 바둑알 생산방식을 업그레이드 한다.
최근 인터넷 바둑의 보급으로 바둑알을 구입하는 사람은 줄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바둑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수출이 늘어나고 있다. 부친의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허윤구 대표는 "태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최근 '바둑 열풍'이 불고 있다. 태국의 경우 현지 바둑 인구만 15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바둑 열풍으로 힘입어 신광바둑은 중국, 일본을 비롯해 태국,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네덜란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 남미와 아프리카 빼고는 거의 수출을 하고 있다.
바둑알 가격은 재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보통의 흑백 바둑알은 3000원부터 1만 4000원이면 구입이 가능하고, 컬러바둑알은 이보다 비싼 2만 5000∼6만 9000원에 판매된다.
최고가 제품은 허 대표가 개발한 '음이온·원적외선 바둑알'로 흑백 한 세트에 12만 원이다.
허 대표는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나라만 해도 60∼70개국에 달한다"며 "2010년 중국 아시안게임에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해외 수출도 늘어날 전망"이라고 말했다.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무대로 뻗어나가는 신광바둑의 발빠른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글=김경환 기자·사진=신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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