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3월 괴뢰국인 만주국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만주 전역을 잠식해 들어가자 한·중 간의 연합전선 움직임도 빨라졌다.

1931년 12월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지린성 자위군과 연합군 결성을 합의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연합군의 공격목표는 쌍성보로 한국독립군은 1931년 11월에 결성돼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대일항쟁을 전개한 독립군부대였고, 지린성 자위군은 지린성을 중심으로 반만·항일에 뛰어든 중국인 부대였다. 1932년 9월 19일, 한·중 연합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한국독립군은 자위군 산하의 고봉림부대와 함께 서문쪽을 맡았고 2시간에 걸친 총공세로 만주군은 1000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2000여 명이 투항했다.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사상자는 각각 30∼40명에 불과했으니 대승이었다. 이후 쌍성보는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혼전을 거듭하다 결국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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