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없는 리얼리티 쇼를 표방한 연예 프로그램이 케이블TV를 달구고 있다. 연예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카메라 앵글로 엿보는 프로인데 알렉스(추헌곤), 앤디(이선호) 등이 뭇 남성들의 질투를 받으며 떴다. 그런가하면 '애완男 키우는 주인女'라는 테마의 리얼리티 쇼도 있다. 주인(여자)이 부를 땐 언제든 달려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놀이공원을 가야 한다. 뭐든지 주인 뜻대로 놀아줘야 한다. 거기엔 골치 아픈 로맨스는 없다. 그냥 말 잘 듣는 젊은 '펫(pet)'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맨발을 씻겨주고 100송이 장미를 선물하며,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하고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준다. 침대에서 게으름 피우는 그녀에게 베드 브런치(brunch)를 건네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포즈로 '공주님 식사'를 한다. 여기까지 보면 '그림'은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이 리얼리티 쇼에는 리얼리티는 없고 쇼만 있는 듯하다. 거기엔 땀 냄새 푹푹 나는 삶의 고단함이 없고 치열하게 사는 만인의 배고픔이 없다. 곱게 자란 공주님이 있을 뿐이다. 돈이 없어 쉰내 나는 밥을 먹어야 하고, 상사에게 지청구를 들으며 월급을 받아야 하는 리얼리티가 빠져 있다. 그야말로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말자'다.

▶중국 지진 참사 속에서 나흘 만에 한 남성이 발견됐다. 건물더미에 깔린 이 남성은 외쳤다. "저는 살아남아야 해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여생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죽음을 품에 안은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빵과 물이 아니었다. 뭉개진 두 다리와 두 팔이 아니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아내였고 사랑이었다. 단지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한 줌의 희망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조된 남자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런가하면 TV에서 금기시되던 임종 장면을 방송해 눈물샘을 적시기도 했다. 암과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던 한 여인이 마지막 생명의 끈을 놓는 임종의 순간에 딸의 이름을 듣자 다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었다. 사랑 앞에서 한없이 강해지는 모정이자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이 두 가지 얘기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임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척에 있고 건강한 일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임을 일깨운다.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먹더라도 '배부른 밥상'이 있고 가난한 아침일지언정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행복인 게다.

▶돈타령, 사랑타령, 신세타령에 대한민국 곳곳은 '한 많은 이 세상'이다. 경유값이 휘발유값을 역전하다보니 고기 투망 대신 건달 생활하는 게 낫겠다며 주먹을 쥔다. 비료값도 못 댈 바엔 그따위 농사가 대수냐며 모내기판을 뒤엎는다. 건강한 식탁을 위한 민심은 거리로 나선다. 그 촛불 앞에 변변히 힘 못쓰던 공권력도 요즘 힘깨나 쓴다. 그래서 한국에서 산다는 건 억울하게 사는 것이라 했던가. 뭐 하나 속 시원히 되지 않는 세상, 그래도 오늘 연인과 아내 앞으로 '미고사축'(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축복해요)의 러브레터라도 써보자. 철천지원수 같은 뺑덕어멈 아내도, 밴댕이 속보다 좁은 소갈머리 남편일지라도 곁에 있어줘 고맙다고. 일주일에 한번쯤이라도 한 쪽 팔을 비워두고 햇살 가득한 공원에서 그녀에게 뜨거운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팔베개를 해주면 어떨까. 우리만의 로맨스를 위한 리얼리티 쇼를 직접 해보는 거다.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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