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충남도 행정부지사

몇 잎 남지않은 나뭇잎이 세상과 세월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사색의 계절을 맞아 개인적으로 위대한 발견(?)이 하나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왜 나는 좋은 집안, 좋은 얼굴, 좋은 머리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고 원망스러운 때가 많았다.

인간이 법 앞에는 평등할지 모르지만 실제 삶의 조건은 전혀 불평등하다고 여겨졌다. 무슨 철학을 공부하거나 별도의 정신수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새삼 터득하고 있다.

얼마 전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부지사 직책이 부럽다는 친구에게 내가 오히려 그 친구를 부러워하는 다섯가지 이유를 얘기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지금껏 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사니 친구야말로 '실질적인 효자'이며, 일찍 결혼해서 자식농사(?)를 빨리 지어 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고, 특용작물 수입 등으로 도시 못지않은 문화생활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산불이니 각종 재해니 심지어는 지역 애경사 문제까지 실질적으로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저 뱃속 편하게 사니 큰 스트레스 없는 '편안한 삶'을 꾸리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얼른 수긍을 않던 친구들도, 몇 번의 보충설명과 막걸리잔이 이어지더니 '결국 사람은 셈(same) 셈(same)'이라는 결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와 공무원 생활하느라 고향을 떠나 있느니, 시골에 묻혀 농사지으며 살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오히려 부럽다는 내 말투에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얼마 전 다른 친구들과는 연령대별로 인간이 평등해진다는 얘기를 나눴다. 나이 40대가 되면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살아가는 '지혜'가 같아지고, 50대가 되면 고혈압등 누구나 한가지 이상 병에 걸려 '건강'이 평등해진다. 60대가 되면 대부분 퇴직을 해 '명예' '지위'가 같아지며, 그래도 끝까지 남는 건 '돈'인데 이 또한 70대가 되면 몸이 아파서 쓰고 싶어도 맘대로 못쓰니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80대가 되면 세상을 떠나는 시간대가 다소 차이가 있을 뿐 '수명'이 사실상 평등해진다는 말이다.

지구의 역사는 수십억년이고, 영화 '쥬라기공원'의 공룡이 살았던 시대도 수억년, 인간이 처음 지구상에 출현한 것도 수백만년 전이지만, 우리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역사의 페이지는 넓어도 탁월한 정치지도자나 위대한 발명가, 유명한 장군 등 몇 사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역사의 '무명용사'일 수밖에 없고 불과 백년 후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고 역사에 기억되지 않는 삶은 다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은 아니다. 별볼일 없는 인생이니 그저 적당히 술이나 마시고 즐기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삶의 현실 굴레가 그러한 만큼 정말 우리가 끝까지 추구할 대상과 집착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다시 갖고 싶다는 뜻이다.

이 좁은 국토공간과 짧은 삶 속에서 서로 영원하지도 않은 일에 쉽게 흥분하거나 오래 다툴 일은 아니라 싶다.

어찌 보면 내용없고, 부질없고, 이름모를 꽃처럼 살다 사라져 가야 하기 때문에, 평범한 우리 인생이 더욱 소중하지 않을까? 인간이 평등하다는 위대하지 않은(?) 사실을 이제 뒤늦게서야 깨닫게 된 내 둔한 머리가 그래도 아쉽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세상과 세월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