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한 논설위원

얼마 전 카드빚에 허덕이던 신용카드 회사 직원이 고객 수백명의 정보를 카드정보 중개상에 팔아넘겼다가 구속된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생활필수품이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신용카드. 지난 1978년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신용카드는 그야말로 '귀족과 품위'의 상징이었다. 발급 절차도 까다로워 웬만한 신분이 아니고서는 소지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 카드 보급은 급격히 늘어났고 급기야 카드 발행 매수가 1억장을 넘어섰다. 직장인 1인당 5매꼴로 카드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은행을 찾지 않아도 대학생이든 미성년자든 길거리에서 야구장에서 쉽게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으니 이렇게 서비스가 일품인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선진국의 경우 금융거래를 통해 신용을 쌓지 않으면 카드 발급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국만 해도 신용거래가 없는 사람이면 보증인을 세워야 할 정도로 발급절차가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다.

발급이 쉬운 만큼 그 폐해도 양산되고 있다. 국내 신용불량자가 300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카드빚 때문이다. 경제활동 인구의 20%가 신용불량자라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 가운데 10%는 공무원과 금융기관 종사자들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신용카드 만한 게 있을까. 쓰면 쓸수록 세제혜택도 받고 영수증으로 복권을 추첨해 최고 1억원의 복금까지 탈 수 있으니 마구 사용하라고 권장할 판이다.

그러나 최근 발생하고 있는 흉악 범죄의 이면에는 항상 카드빚이 도사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랴. 흥청망청 쓸 때는 좋았으나 갚으려니 엄두가 안나 궁리 끝에 한다는 짓이 고작 강도며 납치며 살인이다.

부천에서는 며칠 전 8000만원의 카드빚을 진 대학생이 빚을 갚아 주지 않는다며 어머니와 할머니를 무참히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주부는 카드빚 3000만원을 갚기 위해 자신이 납치된 것처럼 자작극을 꾸미고 남편에게 5000만원을 요구하다 경찰에 붙잡히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 인질극과 납치극도 끊이질 않고 있다.

카드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모럴 해저드' 현상도 사회 전반에 파고들고 있다. 사실 신나게 써대고 궁지에 몰리면 나 몰라라 하고 '만세'를 부르면 그만이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둘째 문제다.

물론 신용카드가 신용사회 구현과 과세 투명성 확보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키 어렵다. 무엇보다 과세 투명성으로 인한 세원 확보는 카드사의 공으로 돌릴 만하다. 서민들이 고리사채를 얻지 않고서도 편리하게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좋다.

신용카드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라고 해도 이는 스스로의 신용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작금과 같은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카드 사용은 신용불량자 양산과 함께 범죄 유발의 모태가 될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카드업계에 의하면 지난해 한국인의 카드 사용 금액은 미국 영국 중국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5위, 일본은 6위다. 신용사회가 정착된 것인지 아니면 '쓰고 보자'식 사회로 가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신용카드는 양날의 칼과 같다. 잘만 활용하면 가계에 도움이 되지만 자칫 유혹에 넘어갔다가는 신세를 망치기 일쑤다. 분수에 맞는 소비만이 화(禍)를 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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