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백제인들의 남여 사랑은 뜨겁고 짜릿하다.

옛날 고분에서 흔히 발굴되는 반쪽 난 구리거울이 '죽어서도 변치말자'는 사랑의 맹서였음을 생각하면 그 순박함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최근에는 무덤에서 관옥(管玉)이 출토되어 감동을 주고 있다. "왜 부러뜨린 관옥이 죽은 사람의 무덤에 묻혀 있을까?"

공주시 수촌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4호, 5호 고분에서 손가락 크기의 유리로 된 관옥이 죽은 이의 머리맡에서 딱 한 점씩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발굴하던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팀들은 처음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 의문은 풀렸다.

두 무덤에서 나온 관옥은 각기 독립된 장신구가 아닌 하나를 둘로 부러뜨린 것임이 확인됐고 그 무덤의 주인공이 부부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로맨스 스토리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자의 무덤에 관옥을 부러뜨려 그 한쪽을 묻고 나머지 한쪽은 여자가 가슴에 지니고 살다 세상을 떠나자 함께 묻은 것이다.

그들은 살아서 그렇게 맹세했을 것이다.

"우리 죽어서 만나게 되면 '내 남자', '내 여자'임을 이 관옥을 맞춰 확인하자.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사랑하며 살자."

이런 지순한 사랑의 증표가 1500년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모습을 들어 낸 것을 생각하면 발굴이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스러운 마음도 든다.

경주 불국사의 무영탑(석가탑) 전설은 또 얼마나 애절한가.

백제사람 아사달은 당시 최고의 탑 쌓는 기술자로 신라에 까지 와서 다보탑을 완공한다.

그리고 이어 석가탑을 쌓는 일에 착수하는데 백제에 있던 부인 아사녀가 남편이 그리워 서라벌(경주)까지 온다.

탑 쌓는 공사장 밖 연못에서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어느 날 밤 연못에 비치는 남편의 환상에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만다.

탑 공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아사달도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를 부르며 빠져 죽는데 그때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하여 무영탑(無影塔)이라 한다는 것.

백제의 노래로서 유일하게 면면히 이어져 왔고 1493년 편찬된 '악학궤범'에 까지 오른 정읍사(井邑詞)는 또 얼마나 간절한가.

"달하 노피곰 도다샤(달아 높이 떠라)

머리곰 비취오시라(멀리 비춰다오)… " (후략)

이 노래는 백제의 여인이 멀리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달님에게 그의 무사귀가를 간절하게 비는 내용이다.

잠을 못 이루고 달님을 향해 그 순박한 심정을 읊은 백제의 여인… 정말 한 편의 서정시다.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 때의 선화공주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서동요(薯童謠) 역시 그런 감동을 주고 있다.

백제의 무왕이 신라와의 분쟁을 막기 위한 정략결혼으로 선화공주를 사랑하고 결혼을 한 것이라는 일부의 해석도 있지만 그 사건의 전개가 정략적이라기엔 너무도 순수한 면이 있다.

요즘 봄이 되면서 결혼 청첩장이 수북하게 쌓인다. 그런데 이들 신혼부부 10쌍 중 3쌍은 5년 안에 이혼을 한다는 통계를 보면 백제, 우리 조상들의 뜨겁던 부부사랑이 생각난다.

또 최근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여 간통죄로 기소된 모 연예인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청구했는데 곧 판결이 임박했다 하여 결과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성(性)의 선택을 법이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설혹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충청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간통죄가 없어져도 충청도 사람들은 '내 남자', '내 여자'의 순결을 지킬 것이다. 조상 백제인들이 그랬으니까.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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