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름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 일제치하인 1935년 3월 1일 중국 북경 만수산에서 동지들과 함께한 김태원 선생(가운데). 정인씨는 그날 아버지의 현몽처럼 이 땅에 태어났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는 사람일지언정 사선을 오가며 30줄 훨씬 넘겨 얻은 핏줄, 왜 살갑지 않고, 왜 그립지 않겠냐마는 그런 속내대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더 안타까웠으리.

동쪽 하늘 바라보며 '지금쯤 요만큼 자랐을 게야, 말문도 텄겠지' 삭이고 또 삭이며 부정(父情)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그 아들이 까까머리 소년이 돼서야 한 지붕 아래서 밥상을 함께 맞았다.

내 조국 위해 다리 한번 제대로 누이지 못하고 바친 청춘은 이른 백발로 간데 없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부자지정(父子之情) 2년 만에 당신은 그렇게 서둘러 가셨다.

김정인(金正仁·68·충남도체육회 사무처장)씨에게 아버지 김태원(金泰源·1951년 작고) 선생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가슴속 깊이 각인돼 살아 숨쉬고 있다.

'피는 죽음으로써 태어나니 그 죽음은 의기로 살아나고 의기는 다시 충정으로 살아나도다. 충정은 절개로 살아나고 절개는 대나무로 살아나니 머금은 피는 오랜 세월 일관되고 대나무 빛은 언제나 봄빛으로 푸르도다.'

'대한 독립' 단 하나의 사명으로 살다 간 애국지사의 피 끓는 의지와 대쪽 같은 절개의 일생이 담겨 있는 시, 이 시의 주인공이 김씨의 아버지, 김태원 선생이다.

"처자식 모두 두고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시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셨답니다. 1922년에는 평안북도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경찰관 4명을 사살하시고 그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임 아래 벽창의용단을 조직해 신출귀몰, 평북지방에서 활동하며 일본군과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27년에는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사형 언도를 받으셨는데 형 집행 직전 평양 감옥을 탈옥하셨다지요."

아픈 역사를 잊고 사는 후세들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리는 이야기, 그의 아버지는 조국의 아들이었다.

조부모는 자식을, 어머니는 남편을, 정인씨는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를 조국에 임대한 채 살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중근, 이시영 집안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5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정인씨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이 연 맺으신 지 20년이 지나서다.

그의 탄생에는 전설 같은 아버지의 애국애족 정신이 깃들어 있다.

"중경에서 광주로, 다시 남경을 거쳐 북경으로, 상해로, 중국 땅 안 다녀보신 곳이 없으셨답니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높은 산자락에 올라 동쪽 하늘 보며 독립을 기원하셨고, 그날도 북경에 있는 만수산에 오르셨는데 흰 도포자락이 휘날리는 듯하더니 이내 머리 속에서 그려봄직한 할아버지 한 분이 큼지막한 수레를 타고 나타나셨다지요. '네 정성이 갸륵해 선물을 하나 주마' 하시곤 홀연히 사라지셨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열흘 뒤 고향에서 늦둥이 아들을 봤다는 연락이 왔답니다."

그날이 정인씨가 태어난 1935년 3월 1일, 정인씨의 이름도 수레바퀴에서 딴 외자 철(轍)이었다. 2000년 7월, 정인씨는 아버지의 궤적을 좇아 북경엘 갔다.

70년 세월에 주소만 바뀐 당신이 머무르시던 그 집과 만수산 꼭대기를 찾아 복받치는 설움에 목놓아 울었다.

해방 이후에도 아버진 백범 김구 선생의 휘하에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을 맡으며 건국사업에 기여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정인씨는 아버지의 사랑이 극진하다는 생각을 백범 선생을 통해 했다.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백범 선생을 세 번 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업 중인 저를 불러내시기도 하셨어요. 늘 똑같은 말 '제 아들 녀석입니다'라며 백범 선생에게 인사시키셨고, 백범 선생은 마치 친손주 대하시듯 손을 잡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1949년 백범 선생의 타계는 아버지의 명도 재촉했다.

정인씨가 조석으로 아버지를 곁에서 보고 산 것도 그때부터.

이런저런 완장 다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사시던 아버지는 따뜻하고 인자한, 그래서 이별이 너무 아팠던 진한 여운을 남기셨다.

"오정동 집에서 홍도동 고개를 넘다 보면 종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다가 혹여 들켜 무안해 할까봐 가던 길을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집은 늘 동네 사랑방이었고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동네 사람들 고무신을 제 짝 찾아 가지런히 놓으시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틈틈이 집에 계실 때나 2년간 완전한 동거를 했을 때나 단 한 번 나무라시는 일도, 역정을 내시는 일도 없이 포근히 웃어 주셨다.

지난 세월 아비로서 못 다한 책임을 이해해 달라시는 듯….

큰일에 나선 아버지를 대신해 독립군의 아내로 억척스럽게 집안 살림을 일으키신 어머니 덕분으로 정인씨 식구들은 배 곯는 일이 없었다.

오랜 빈자리에 익숙했던 정인씨에게 아버지와의 2년은 70 평생 가장 행복한 시절.

젊어 고생으로 성성한 백발처럼 쇠약해진 데다 백범 선생 타계의 충격이 더해져 아버진 시름시름 앓으셨고, 결국 정인씨가 16세 되던 1951년, 운명을 달리했다.

"이제 우리 아버지도 늘 옆에 계시며 토닥거려 주시겠구나 했던 어린 기대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죠. 원망도, 야속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 천지 막막했을 뿐…."

돌이켜 보면 나라 위해 온몸 불태우느라 소박한 당신 인생 저버렸으니 한솥밥 먹으며 부자지간 정을 나눌 겨를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

정인씨에게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신비한 영웅이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책임감 강하고 실력 있는 독립군이자 실무책임자였다는 동지들의 귀띔, 나라사랑과 의리를 목숨보다 귀히 여긴 행적, '뉘 집 자식'이라며 우러르는 시선들.

가시기 전 당신이 그랬듯 절개와 정직을 초지일관 받들고 살라는 유지를 담아 아버진 정인씨에게 '일립(一立)'이라는 호를 내주셨다.

한 번도 "내 호가 이것이요" 하고 써 본 적은 없지만 1960년 공채로 공직에 입문한 뒤 1995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一立'은 그의 머리 속에서 한 번도 빠져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렵니다. 비록 아버지처럼 큰일은 못했어도 국가의 녹을 먹으며 이름 앞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뜻을 잇는 일이라고 믿으니까요."

각박하고 어지러운 세상, 인생살이 고달플 때마다 정인씨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기운을 차리곤 한다.

지난 63년 나라님이 주신 '건국공로훈장증'. 아버지를 대신한 그 훈장에 일말의 부끄러움 없는 여생을 꿈꾸며 정인씨는 '一立'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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