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바다 지키며 새 희망 키워가죠"

▲ "어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죠." 바닷사람이 된 지 8년도 안 됐지만 베테랑 어부 못지 않은 손놀림과 걸쭉한 농이 그를 천상 뱃사람으로 만든다. <지영철 기자>
바다는 바닷가와 다르다.

바닷가에 있을 법한 낭만도 망망대해에서 인생을 담금질하는 어부들은 가족이 있는 뭍에 툴툴 털어놓고 바다에 들어서기 마련이다.

하늘이 노하고 '그네들의 땅'인 바다 색깔이 검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 바다를 품고 사는 '어부의 바다'를 뭍사람들이 알 리 만무하다.

바다에 친구와 친지를 쓸려 보내고, 비릿한 항구 한 켠에서 소주병과 싸움하는 퇴역 어부들은 그네들의 땀과 용기가 모여 바다가 됐다고 응어리진 가슴을 소주잔에 타며 얘기한다.

바다는 치열한 생존이자 유일한 인생 터전이다.

"어이 최 사장, 오늘 물이 어때."

뙤약볕과 파란 물, 어깨 멜빵을 한 방수 작업복에 손때 묻은 조그마한 배 한 척이 만선의 깃발을 올리고 항구에 들어섰다.

안면도 고남면 구매항, 채 10여호도 안 되는 조그마한 어촌에 냉동창고 하나와 뻗다 만 듯한 20m 선착장이 항구의 전부라면 전부.

충남 서해안에 길게 뻗은 안면도 끝자락 고남면은 바다 건너편에 대천이 가깝게 보인다는 것이 다른 곳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 전부다. 1000평 남짓한 최씨의 양식장을 지나는 어부 박씨가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는 최씨에게 농을 건넨다.

"물이 물이지 뭐요. 그물 안에서 곱게 자라는 놈들이 그놈이 그놈이지. 오늘은 좀 자랐나…."

얼기설기 소나무와 스티로폼으로 엮어 놓은 4각형 무대, 이곳이 바로 안면도 어부 최규만(50)씨의 인생 무대다.

▲ 어릴 적 지겹도록 가난하게 살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안면도. 그런 최규만씨의 고향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지영철 기자>

최씨는 바닷가에서 흔히 보는 흰머리 듬성듬성하고, 해풍에 검게 그을린 그런 어부다.

바다 갈매기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하늘이 붉어져서야 물질을 놓는 그런 평범한 어부다.

남들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먼 바다꾼이지만 뭍에서 고작 100m 떨어진 최씨의 바다에서는 매일 보는 물고기와 밀고 당기는 똑같은 일과다. 다만 물고기 사료 주기와 질병 관리는 먼 바닷길을 가는 어부들에게는 없는 일이다.

먼바다꾼이 '물고기 길'만 잘 알아도 듣는 어부 소리를 양식업자들은 물고기 마음과 사람 속내를 잘 알아야 어부 축에 낀다.

웬만한 세세함 없인 작은 태풍에 공들인 양식장이 쓸려 나가기 일쑤다.

따지고 보면 최씨는 타고난 어부는 아니다.

40 초반까지 건재업 사장 소리를 듣던 그가 바닷사람이 된 건 채 8년도 안 된다.

그래도 항구에서 베테랑 어부 못지 않은 손놀림과 걸쭉한 농이 그를 천상 뱃사람으로 만든다.

"어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안면도가 고향이지만 어렸을 적 젊은 사람들은 이 곳을 떠나려 했지요. 18세에 서울로 떠나 30세 즈음 형님 사업 잠시 도와준다고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릴 적 지겹도록 가난하게 살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안면도였다.

그런 그의 고향이 결국 인생의 터가 됐고, 인생마저 완전히 바꿔 놓았다.

최씨는 90년대 초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위원장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최규만 이름 석 자 하면 인근 동네는 물론 안면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형님이 고향에서 건재상을 하고 있었는데 문 닫기 일보 직전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고심을 하던 중 한 3년만 형님을 도와 드리자고 내려왔죠. 그래도 서울 물을 먹어선지 장사 수완이 있었고, 제법 돈도 많이 벌어 정착을 하게 됐는데 그 때 그 사건이 터졌죠."

1990년 11월 5일, 한 신문에 안면도에 핵폐기장이 건립된다는 기사가 올랐다.

그것도 최씨의 고향인 고남면, 지금의 구매항이 핵폐기장 부지로 낙점됐다는 소식이었다.

확인을 위해 최씨 등 지역 유지들이 바로 다음날 충남도청을 찾아갔다.

안면도 핵폐기장 건립, 사실이었다. 돌아오며 마을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위준비를 지시했다.

"이날부터 시작된 시위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고향을 지키겠다고 덤볐던 사람들은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과 함께 삼삼오오 분열되기 시작했고, 살벌한 분위기로 변해 갔습니다."

정부 조사단이 내려오고, 주민들과 개별 접촉을 시작하면서 민심이 바뀌었다.

엄청난 보상가에 주민들은 흔들렸고, 찬성파와 반대파간에 대립이 심화됐다.

온 동네가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었고, 한밤에 마을사람들이 또 다른 마을사람을 끌고 나와 마을회관 앞에서 잘못을 다그치는 등 무법천지가 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하던 고향 사람들이 원수로 변했다.

고향 바다를 지키자는 일념 하나였다.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위원장으로 활동한 최씨가 그 핵심에 있었다.

정부의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주민들의 분열은 더욱 심화됐고, 지금의 구매항 주민 전체가 핵폐기장 건립 동의서를 정부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을 했죠.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추스렸고, 서울과 대전 등을 오가며 반대활동을 적극 전개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93년 5·19 문서 탈취사건이 터졌다.

최씨는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 서산에 설치된 정부 직원들의 숙소를 급습했고, 안면도 핵폐기장 동의자 명단이 담긴 비밀서류를 탈취했다.

"경찰서에 잡혀갔죠. 탈취한 문서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몰래 복사본을 만들어 경찰서에 제출한 후 나중에 명단에 적힌 사람들과 개별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길 1년여, 마을 주민들의 반대 동의서를 만들었고, 주민들에게 질린 정부도 결국 핵폐기장 건립계획 철회를 선언했다.

4년여 만의 승리. 고향을 지켰지만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는 심했다. 반투위 활동에 전념하던 최씨 역시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 위기에 몰렸다.

고향을 지켰으되 모든 것을 잃었다.

"한동안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의 구매항으로 살림터를 옮겼습니다. 당시 저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던 구매항 사람들은 저를 귀신보듯 했죠. 마을 사람들을 위해 화합의 잔치를 열었고, 어부 생활도 그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후에 털어놓는 너털웃음도 그만큼 세월이 흘러야 가능했다.

"이제야 마을사람들과 살갑게 지낼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얘기를 안할 뿐 아직까지 그 때의 상처는 남아 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나가던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고 건재업으로 돈을 벌게 한 것이 고향을 지키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하늘이 저에게 준 운명인 듯 싶네요."

여름 뙤약볕이 바다 위를 스치며 따가움을 최씨에게 던진다. 그래도 고향 햇살에 최씨의 얼굴은 해맑게 빛난다.

뱃사람은 거칠다. 아니 거친 바다가 그를 거칠게 만든다. 그 안에서 안면도 어부 최씨는 묵묵히 세상을 굽어 보며 고향 바다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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