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애 미술사칼럼니스트

정경애 미술사칼럼니스트
정경애 미술사칼럼니스트

1874년 4월 15일, 전시회가 열렸다. 명칭은 ‘무명 화가, 조각가 등 미술가의 협동조합’이고, 장소는 유명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관객들의 실망, 비평가들의 멸시로 허무하게 끝났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라 샤리바리’에 실린 르 루아의 기사 덕분에 인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로 그 유명한 인상파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파리 미술계는 미술 아카데미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곳 회원들은 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와 국가가 주최하는 살롱의 심사위원을 도맡았다. 아직 미술판매상이나 화랑이 생겨나기 전이어서 살롱전에 입상하는 것만이 화가들이 명성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롱지망생들은 아카데미회원의 화실에서 심사기준대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관행이었을 정도로 살롱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러나 모네를 비롯한 일련의 젊은 화가들은 과감하게 다니던 화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는 마네를 중심으로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갔다. 신화와 종교, 역사 등의 이야기를 정해진 원칙에 따라 그리는 그림이 아닌, 눈에 보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마네의 그림에서 미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에 대한 비슷한 철학을 가졌는데, 근대 생활의 단편이나 자연 풍경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현재성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찰나를 재빠르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소묘와 매끄러운 붓 터치, 인공조명 대신 불분명한 형태, 짧고 거친 붓 터치로 거친 화면 그리고 그동안 금기시했던 원색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의 파리는 185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3세의 파리 재정비 사업 덕에 전형적인 중세도시에서 근대화된 첨단도시로 바뀌었다. 전천후 쇼핑이 가능한 아케이드와 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만국박람회도 개최됐다. 그 결과 파리는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왔고, 새로운 꿈을 가진 예술가들도 각국에서 밀려들기 시작했다. 명실공히 파리는 유럽 문화의 수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문학에서는 감성적인 아름다움이나 꿈을 찾기보다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미술도 사실주의가 대세였다. 보들레르가 ‘현대 삶을 그리는 화가’(1863)라는 글을 통해 화가들에게 도시의 변화하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낼 것을 촉구하면서 도시풍경부터 일상생활 속의 사람 등 동시대의 삶에서 소재를 찾아서, 도시개발 이후의 화려하고 밝은 도시의 변화하는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그려나갔다.

인상주의자들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는 고전에서 근대미술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속한 동시대를 정확히 보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바로 그 삶의 터전인 사회를 직시하고 그림에 반영했다.

선호한 주제는 새롭게 창조된 파리를 배경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무희, 가수, 여종업원, 매춘부 등 어떤 면에서는 뿌리 없는 사회집단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새로움을 추구하고 그 어떤 비판도 두려워하지 않은 인상주의자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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