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시인)

#화신(花信)의 그늘

봄꽃 소식과 함께 말들이 퍼진다. 올봄은 말의 성찬으로 풍성해질까? 총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꽃들이 만개하면서 그 향기가 짙듯, 하마 온갖 말들이 우리 사회를 풍미한다.

꽃 소식은 이미 와락, 밀려오는 느낌이다. 청도 읍성 주변에 있는 한 식물원에서 수선화가 가득 핀 걸 본다. 그 곁에는 복수초 꽃이 노랗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매화도 벌써 피었다. 동백의 만개는 아직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지난주 거제 바람의 언덕 주변에서 동백숲 길을 걸었는데, 꽃들이 듬성듬성 붉은 기를 내보이는 상태였다. 아마도 이번 주말이나 내주에는 만개한 꽃들은 물론 산책길에 떨어져 있는 처연한 낙화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삼월은 그런 꽃소식으로 설레야 한다. 자연의 순환이 가져오는 경이로운 광경을 두고 그려보는 것이겠지만, 올봄의 설렘은 거기에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눈을 통해 꽃들을 보면서 말들을 꽃 피우는 것이 당연히 더 의미 있어 보인다. 그래, 좀은 유치하더라도 "어머, 매화가 당신 땜에 핀 게지요?"라는 말이 나오는 광경을 그린다. 나는 그렇게 올봄을 ‘보고, 듣고’ 싶다.

그러나 올봄은 온갖 말들로 피어서 시끄럽고 분답한 철이 될 듯하다. 선거 바람이 꽃향기처럼 퍼졌으면 하지만, 역시 아닐 듯하다. 새 사람을 뽑고, 그리하여 새로운 봄 사회가 열리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러한 바람과 달리 여전히 꿈의 그늘을 보여줄 뿐이다. 무엇보다 말들이 봄의 화신처럼 그리움을 담은 말이 되지 못해 안타깝다. 말은 추상적이고, 기호적이며,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에 말이 많을수록 의미는 복잡해지고 탁해진다. 그래서 예부터 침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 한 것이리라. 선거가 치열해질수록 그 말들 때문에 어지럼과 살벌함이 느껴지니까 하는 말이다. 선거판의 말들이 대개, 살리는 말들이 아니고 죽이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정치

‘극단의 정치, 분노의 언어’라는 말을 듣는다. 어느 신문 사설의 제목이다. 국민의 힘과 민주당의 공천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총선 운동에 돌입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공천 과정이 국민의 뜻대로 이루어지긴 어렵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여전히 ‘친윤 불패’니 ‘친명 불사’라는 말이 대세를 이루는 듯해서 씁쓸하다. 이런 쏠림이 불식되지 않는 한 선거가 국민의 축제가 되긴 불가능하다.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무관심을 불러올 수 있을 뿐이다. 충성 경쟁이나 강성후보의 득세가 판을 치면 결국 자기들만의 혈투로 난장판이 되기 마련이다. 막말 같은 ‘분노의 언어’는 거기서 나온다.

정당들 마다 진영논리에 갇혀 허우적대는 모습이다. ‘패륜 공천’ ‘목발 경품’이란 말이 살벌하다. 상대 당을 ‘범죄자 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때로는 조선 시대에 죄인을 두고 쓴 말들로 상대 후보를 질타하기도 한다. 상대를 겁주고, 자신을 우월적인 존재로 부각하지만, 결국은 그 화가 자기에게 돌아올 뿐이다. 비극적인 희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선거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듯해서 여전히 우울하다. 선거가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말을 정화하고, 말의 품위를 지키는 가운데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상대와 토론하면서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러한 풍토가 되지 않을까? 막말을 타이르고 정쟁을 중재할 ‘어른’이 없어서, 또는 큰 정치가 갖는 균형감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러할까? 양대 정당의 구조가 화해는 뒷전에 두고 대립으로만 치달으면서 말들이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왜 우리의 선거판은 아이들 학급 반장 선거보다 못하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지경이 되는 것일까?

#말의 꿈

탈무드의 명언이 있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 인간 역시 입으로 걸린다." 말은 힘이 있지만, 화를 자초하는 것일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다. 말이란, 말하는 자와 듣는 자라는 구조를 갖기 때문에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가 따른다. 언어 구사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늘 헤아리며 신중해야 한다. "칼로 벤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말로 벤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총선은 말의 성찬을 이루지만, 그 말들이 ‘분노의 언어’인 한 유권자의 귀에 수용되지 못함은 물론이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이 수사만 번지르한 말 역시 신뢰를 얻지 못한다. 막말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그건 거의 ‘매운맛’ 중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의 한복판은 막말의 범람이라 할 만큼 자극이 강하다. 상대 후보를 자극하고 분노를 부추기기에 각박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진정성 있는 말이 그립다. 좋은 말은 수사의 힘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삶과 생각의 진정성이 받침이 되어야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 정치의 한복판에서 부댓기며 국민을 위한 개진의 몸부림을 친 삶에서 나온 말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가령 고 노회찬이 17대 총선을 앞두고 방송사 토론에서 한, 양당 체제 비판의 말처럼 말이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됐습니다." 이 말은 삼겹살 좋아하는 우리 국민의 식성에 딱 맞아떨어지는 말로 회자됐다.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 아닌, 너와 내가 함께 반성하여 살리자는 말을 친숙한 우리의 식습관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야말로 국민을 의식하고 국민이 바로 선거의 주인임을 내세우는 말이기도 했다.

안개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말의 성찬 속을 헤매면서 문득문득 꿈꾸어 보는, 봄꽃 같은, 화사하면서도 향기 넘치는 말. 우리는 막말이 아닌,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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