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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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정치학자 오스틴 래니는 민주제 국가 국회의원들의 의정 생활 유형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가 ‘정당 병정’(政黨 兵丁· Party Soldier) 유형. 영국 하원의원들이 그 대표적인 예로 당의 엄격한 규율에 얽매여 당의 지도부가 지시하는 대로 의회에서 투표하도록 압력을 받는다고 했다. 독자적인 판단과 권능은 거의 없이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고 돌진하는 군대의 병사와 같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의원들은 당의 규율이 느슨한 덕에 자유롭게, 때론 지도부의 요청을 거스르면서까지 투표하는 재량권이 있다며 ‘독립 활동가’ 유형으로 분류했다.

두 유형의 행태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의 하원의원들은 대부분 ‘장관직을 갖지 못한 평의원’들로 그들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지도자의 눈에 들어 장관에 지명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야심이 있는 평의원들은 자신이 ‘장관감’이라는 확신을 지도부에 심으려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니 당론과 다른 표결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터이다. 오히려 의회 토론에서, 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당 입장을 홍보 대변하고 상대 당에 예리한 질문과 비판을 퍼붓는 전투력을 보임으로써 총리 내각 등 지도부 눈에 들기 위한 병정 역할을 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관 지명도 안 되고 내세울 만한 투표기록도 미미한 평의원들은 유권자 지역구민과의 관계에서는 서비스맨 역할에 더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의 의원들은 정치 생명이 본 선거에 앞선 지역구의 예비선거(primary election) 지명에서 시작한다. 중앙당 지도부는 그 결과에 대해 변경 권한이 없으며 의원들이 의회 표결에서 당 정책에 반해 투표하더라도 효과적으로 제재할 권능도 없다. 때로는 의원들이 ‘지도부의 거수기’ 역할을 거부하고 독립성을 보이는 것이 지역 예비선거 및 본 선거의 매력적인 득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같은 당 ‘명찰’을 단 대통령이나 유력 대통령 후보의 뜻과 다른 정치 행태를 보이면 언론 주목을 받아 선거구에 이름이 더 날리는 효과도 있다. 정치 성패가 거의 전적으로 지역구민의 판단에서부터 시작하는 만큼 지역 사정에 맞춰 자신의 정치적 위치와 보폭을 설정하고 독립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키워나간다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 시각에서 미국의 기준에 맞춘 듯한 이 분류는 최근 들어 많이 퇴색했다. 영국 하원에서도 당론과 다른 표결을 하는 의원이 많으며 미국서도 ‘지도자의 강아지’ 역할을 자처하는 의원이 적지 않다. 특히나 영국인의 눈으로 보면 최고 입법기관 국민대표를 특히 표결과 관련지어 ‘정당 병정’이라고 조롱하듯 분류하는 게 영 언짢을 수 있겠다. 그래선지 요즘 영미권은 물론 국내 정치학자들도 정당 병정이란 용어를 쓰거나, 영국 하원의원들이 바로 그런 유형이라고 비유하는 일을 삼간다. 그런데 희한하지 않은가. 21세기도 4분의 1이 훌쩍 지나고 있는 지금, 2024년 대한민국에서는 국회에서의 표결을 비롯 지도부에 대한 충성도를 바탕으로 정당 병정을 추려내고 또 새로 키워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여야당의 공천작업이 바로 그 모습이다.

공천 파동을 넘어 가히 내전(內戰) 수준에 이르러 ‘비명횡사’ ‘친명 횡재’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민주당 경우가 딱 그렇다. 한 달 전 처음 공천작업에 들어갈 때부터 당 안팎에선, 작년 두 차례 ‘국회의원 (이재명) 체포동의안’ 당시 반란 표를 던진 ‘반명’ 의원들을 철저히 솎아낼 것이란 설이 분분했다. 23년 2월 1차 국회 표결에선 최소 11명, 9월 2차 표결에선 최소 29명의 민주당 의원이 체포 가(可) 표를 던졌다.

부결된 1차나 가결된 2차 표결에서의 각 기권 무효표까지 합치면 매번 근 40명이 당과 이재명 대표의 입장에 반하는 투표를 한 것이었다. 이들이 바로 ‘반명’ ‘비명’이다. 일관되게 이 대표 체포에 반대한 사람들이 ‘친명’임은 물론이다.

체포동의안 표결은 무기명 투표로 이루어졌지만 누가 가 표를 던졌는지는 대충 윤곽이 그려졌다. 그들은 대부분 지난 문재인 정권 시대의 민주당 주류, ‘친문’일 것으로 짐작됐다. 일부는 미디어 출연을 통해 이재명 체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거나 자신이 체포동의안에 가 표를 던진 것을 자랑삼아 흘리기도 했다. 당연히 친명은 친문 등 구주류를 싸잡아 비난했고 당내 갈등 반목은 비등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사이 공천 시즌이 다가왔다. 지도부로서는 ‘시스템과 원칙’을 내세워 ‘합법적 쇄신의 칼’을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피가 흐르고, 일부는 당을 떠나고, 또 일부는 아예 정강 정책 등 지향 이념마저 완전히 다른, 어제까지 비난해 마지않던 상대 쪽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지도부는 요지부동이다. 국회 표결로 드러났던 당의 분할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는 채 현재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은 사정이 다를까. 현역 의원 탈락이 거의 없어 잡음이 적고 감동도, 쇄신도, 활력도 없는 3무 공천이라는 말을 하지만 민주당처럼 ‘국회 표결과 지도부 충성도’를 중심으로 본다면 ‘보은 공천’ ‘답례 공천’이 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은 지난해 12월 이른바 ‘김건희 특검법’ 표결 때 전원 회의장을 빠져나가 일사불란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반대자 전원이 퇴장하고 재석 전원이 찬성하는 이 극명한 표결은 다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재의에 부쳐졌고 지난 2월 말 국회에서 부결됐다. 그사이에 진행된 공천에서 국민의 힘 현역들은 거의 다 재공천됐다. 국민의 60~70%가 특검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으나 공천 시즌 의원들은 절대로 당 의견에 거스르지 않았다.

당 대표가 직접 영입해 국민 앞에 자랑한 총선 예비후보가 김건희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해 대통령실과 당 관계가 한때 껄끄러워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표가 대통령에게 ‘눈 맞으며 기다려 90도 인사’를 한 이후 김건희란 이름은 당내에선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2월 초 대통령이 TV 대담을 통해 김 여사가 명품 파우치를 받은 것은 ‘공작에 당한 것’이라고 규정한 뒤부터 그와 다른 소리 의견을 입 밖에 낸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재공천이란 은전이 주어졌다는 얘기는 그냥 추측일 뿐인가.

각 당의 공천을 보며 국민대표가 정당 병정들로 채워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짙게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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