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애 미술사칼럼니스트

세상의 잣대로 본다면 많은 것을 소유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린 한마디가 뇌리에 남았다. 무난하게는 살았는데, 행복한 기억은 별로 없다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뜻밖의 말이었다. 나 역시 하루하루는 비교적 보람되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내 삶의 주인이 나였는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독 내게 남겨진 시간만큼은 세상을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든다. 그러면서 이 전환점이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으면 한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익숙하고 편안한 자신의 컴퍼트 존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힘듦을 아니까.

그래도 나도 내 삶도 변화되고 싶다.

뒤돌아보면 나는 내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어질 때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를 떠올렸다.

남의 시선에 투영된 내 모습이나 누군가를 흉내 내는 내 모습이 아닌 본 모습을 직시하고 싶을 때, 니체가 말하는 ‘나만의 길’은 언제나 든든한 길잡이가 됐다.

삶의 순간순간에 인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 ‘나만의 길’이 보인다고.

고대 그리스의 작가였던 소포클레스(Sophocles)는 그의 저서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과 ‘안티고네(Antigone)’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알려준다. 오이디푸스는 왕의 신분에서 스스로 눈을 찔러 거리의 방랑자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험난한 운명을 거부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고,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지만, 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진정한 실행자다. 이 엄청난 고통과 맞바꾼 대가는 자유였다.

소포클레스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삶이 아무리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울지라도 주도적이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의미의 아모르 파티에는 우리에게 인생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인생의 승리자는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즉 현재 삶에 대한 긍정이 내 운명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힘과 용기를 준다는 것이다.

현재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자신을 알라’가 답일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나는 아는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씀과도 같은 맥락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은 물론 내가 살아가야 할 의미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고갱(Paul Gauguin)도 그랬다.

머나먼 타국 타히티에서 가족의 유일한 끈이었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는 자살을 결심한다. 죽기 전, 만감이 교차하는 마지막 시간에 그는 자신이 누구이고 실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 유명한 대작을 남겼다.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본다. 진정한 삶은 어떤 것이고,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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