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시인)

#폐허의 미학

한 겨울에 ‘거기’에 가니 여전히 ‘가을’이었다.

대전의 복합 문화 공간 헤레디움의 안젤름 키퍼의 전시. ‘폐허의 미학’으로 불릴 정도로 황폐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이 거장의 작품을 국내에서 날것으로 대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 그래서 이 전시가 그를 맞닥뜨릴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지난 가을부터 벼르고 벼른 터였다. 그리하여 전시(23년 9월 8일~24년 1월 31일)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겨우 시간을 내어서 대전행 기차를 탔다. 이 전시가 나의 올겨울의 봄꿈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전시 제목은 ‘가을(Herbst)’. 대형의 평면 작품들 20여 점이 ‘거대한 풍경’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가을’은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잘 알려진 시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덜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이미 파울 첼란과 잉게보르크 바하만 등의 시들을 자신의 작품들의 자양으로 받아들여 기운을 뿜어낸 바 있는 그다. 이번에는 릴케의 시 ‘가을’과 ‘가을날’ ‘가을의 마지막’이 전시를 관통하는 중심을 이룬다. 가을이 주는 고독과 허무의 감성을 어두운 색조를 바탕으로 한 폐허의 이미지로 부각, 교묘하게 소멸과 생성의 기운을 아로새겼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시구가 윤곽만이 겨우 드러나는 건물들이 있는 폐허 위에 쓰여 있다. 오렌지 빛 숲들과 칙칙하게 말라비틀어진 낙엽들이 어지러이 쌓인 가운데, 하늘이 살벌한 분위기로 바라다 보인다. 평면적인 색칠은 두터운 물감 덩어리로 하여 입체성을 이룬다. 거기에 나뭇가지와 숯 등 이질적인 물질들을 화폭에 붙여서 구성하고, 금박과 납으로 빚은 나뭇잎으로 입체적인 묘사의 효과를 낸다, 황량한 분위기지만, 금빛 물감의 범람과 거칠고 야성적인 붓질이 오히려 광휘로 번득이기도 한다.

그가 보여주는 폐허는 모든 것이 부서지고 파괴된 공간감과 두텁게 덧씌워진 시간의 인식을 통해 오히려 서정성이 도두라져 이상하게도 생성의 예감을 느끼게 하는 반전의 미학을 드러낸다. 납과 금박이라는 물질들을 통해 나약함과 영원성을 병치해서 보여주기 때문일까? 두 이질적인 세계의 융합을 통해 회색의 세계와 금빛의 세계를 하나의 가능의 세계로 버무려서 희망의 불씨처럼 빛나게 만들어내는 것일까? 연금술적인 낙관의 전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가 보여주는 폐허가 갖는 봄의 예감 같다.

나는 이 겨울의 꿈을 역설적이게도 ‘가을’인 그의 그림 앞에서 다잡는다. 그래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다 포함하여 생성한다. 그의 ‘매혹적 폐허’가 보여주듯, 겨울이 춥고 황량해도 지난 계절의 기억의 온기는 사그라지지 않은 채 대지 아래서 꿈틀거려 다가올 봄의 기운을 속으로 지펴낼 것을 희망한다.

#신춘문예

그리고, 한 겨울에 ‘거기’에 가니 또, 이미 ‘봄’이었다!

신춘문예 시상식이 열리는 곳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국의 신문사들이 다투어 벌이는 신춘문예 결과가 새해 벽두에 발표되고, 이어서 이달 내내 신문사 마다 시상식들이 열리고 있다.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열어갈 야심 있는 문인들의 봄꿈이 이미 만개한 곳들.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젊은 당선자들은 생경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문학의 미래의 창을 흔들어 보인다.

한국에서 신춘문예라는 제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5년 동아일보가 문학작품의 공모를 연말에 실시하면서부터다. 문청들이 신춘문예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기량을 뽐내고, 이를 통해 문단에 등단할 수 있다는 제도성에 끌려 신춘문예는 1930년대 이후 가장 중요한 신인 문학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문단에서는 당선자를 문인으로 인정해주는 게 관례다. 신춘문예가 신인 발굴을 통해 새로운 문단의 기운을 쇄신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국 문단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리의 신춘문예 제도가 일제 식민지의 잔재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이미 신문사들 마다 경쟁적으로 이를 수용하고 고착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제도가 이제는 하나의 대세로 굳어진 상태다.

신춘문예 시상식은 어느 행사장보다 환한 느낌이다. 한국 문학의 봄꿈의 가장 도두라진 현장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젊은 신인들을 대할 수 있다는 신선감이 넘친다. 선배 문인들도 꽤 참석하여 그들을 축복하고 그 전도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 훈기가 가득한 곳이다. 그들의 언어는 우리 문학의 최첨단의 언어인 만큼 젊고 패기가 넘쳐나서, 다소 들떠 있는 듯한 수상 소감을 듣는 것도 즐겁다. 행사장에 앉아서 그들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는 그런 느낌을 의식적으로 만끽한다. 거기서 한 수상자가 "우리 아버지는 꽃집을 하시는데, 나는 꽃 알레르기가 있어요"라는 고백을 듣는 것도 신선하다. 꽃 알레르기가 있다니, 과연 시인이군하고 웃음을 머금기도 한다.

그러나 신문문예의 시상식을 나서면 어두운 밤길처럼 그들 앞을 막아서는 게 있으리라는 예감으로 나의 마음은 애틋해진다. 몇 년 전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소설로 당선된 한 신인작가의 말이 되씹힌다. "신춘문예는 언덕 같다. 언덕을 오를 때 끝에 대해 생각하게 되듯이, 신춘문예를 준비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끝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김화진)

올해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그 ‘언덕의 끝’에 이른 이들이다. 그 ‘알 수 없는 끝’에서 그들이 본(또는 내다봐야 할) 현실은 어떠한지 물어보고 싶다. 그래, 그들은 한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보다 더한 세계, 곧 본격 문학인의 삶을 ‘시작’하는 고통을 껴안게 될 것이다.

※이 기고는 지역신문인 영남일보(대구·경북), 중부일보(경기), 무등일보(광주·전남)와 함께 게재됩니다. 사외(社外)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