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지난해 1월 5일 저출산고령사회위 부위원장 나경원은 기자간담회에서 "청년들이 경제적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돈을 주는 것 자체만으로 출산을 결심하지는 않겠지만, 그 어느 나라도 돈을 투입하지 않고 출산율을 제고한 경우는 없다"며 현금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당시 대통령실은 "윤석열 정부의 관련 정책 기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직접 반박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나경원이 20일 후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의문이 풀렸지만, 대통령의 전당대회 개입을 위한 정치적 이유로 나경원의 제안을 무작정 반박한 윤 정권의 과오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난해 12월 하순 정부는 저출산 대책에 현금 지원을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년간 허송세월이 안타깝지만, 윤 정권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저출산 대책 문제와 관련된 금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지난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가족사회학 석학인 야마다 마사히로는 일본 저출산 문제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고 했다. "수입이 불안정한 남성은 결혼 상대자로 선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내용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금기를 깨야 한다. 해결하지 않으면 저출산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려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주제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그런 위험을 피해 무난한 정답을 제시하는 게 그간 유행처럼 번져왔다. 무난한 정답은 무엇인가? 사회를 개조하는 수준의 근본적이고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서울공화국 해체’와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면 박수를 칠 일이지만, 그게 아니다. 대부분 추상적인 삶의 원칙과 자세를 바꿀 걸 요구하는 것인지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사실상 대안이 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 유행은 익명의 댓글 공간에까지 침투했다. 1년 전 나경원의 저출산 대책에 대해 중립적인 칼럼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현금 지원에 대해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헬조선 타령’을 해대면서 출산은 미친 짓이라는 식의 논조를 펴는 게 아닌가. 내가 나중에 글을 쓰기 위해 챙겨둔 댓글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애를 낳는 건 가장 존재의 본질과 관련된 사안이다. 20세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우리들 대다수는 헬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대체 누가 제정신 갖고 애를 낳겠는가? 이 지옥으로 내 아이를 끌고 들어오라고? 기자 포함 공식 채널에 있는 대다수 저능아들 들어라. 다시는 돈줘서 애낳게 하자는 개 소리 하지마라."

말만 정중하고 부드러울 뿐 이와 비슷한 논조로 쓴 유명인사들의 칼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주장은 타당한가? 위 댓글은 돈 줘서 애 낳게 하는 게 효과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효과가 있건 없건 그건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건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유명인사들이 쓴 칼럼엔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 많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30대 후반의 소득 상위 10%의 혼인율이 91%인 반면 하위 10%는 47%라는데, 왜 돈이 결혼·출산과 무관하단 말인가!

"돈으론 안된다"고 역설하면서 꼭 거론하는 게 지난 16년간 280조원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어느 언론이건 이 주장에 대해 한번쯤 제대로 살펴보면 좋겠는데, 그런 검증이 없다. 나는 이화여대 교수 최재천의 다음과 같은 반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부가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 정부는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투자했다는 예산은 곁다리에 쓴 것도 다 합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돈을 많이 쓴 나라 축에 끼지도 못한다."

돈을 많이 썼느냐의 여부 못지 않게 중요한 건 돈의 지원 방식이다. 간접 지원이 품위도 있거니와 장기적인 해법이지만,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면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뜨겁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한국엔 좀 한가롭게 여겨진다. 작가 김진명은 그간의 지원이 처참하게 실패한 건 간접 지원이었기 때문이라며 "출산 인센티브 금액을 높게 책정한 나라들의 출산율이 급속히 높아진 걸 보면 지금 같은 비상 국면에서는 직접적 현금 지원이 정책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을 지지하면서 직접적 현금 지원에 대한 편견을 깨자고 호소하고 싶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강원은 지난 5년간 출생아 수 감소율이 가장 낮았으며, 충북은 지난해 출생 신고 건수에서 유일하게 전년 대비 1.5% 늘어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강원과 충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직접적 현금 지원을 과감하게 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겉멋은 없을지 몰라도 실효성이 있는 직접적 현금 지원처럼 실속 위주로 나아가면 좋겠다. 관(官)의 입장에선 실속 위주의 해법에 가장 큰 걸림돌은 논란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려는 보신주의다.

20~34세 성비를 시도별로 보면 서울은 여성 100명당 남성 95.3명인데 경북(126.2), 충북(122.6), 경남(122.1), 전남(120.4)은 120이 넘는 심각한 남초(男超)다. 주로 일자리 때문에 지방 여성들이 서울행을 택한 결과다. 이걸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해 미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서비스 행정이 필요하다. 이걸 시도한 지자체들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뒷말과 흠집잡기에 포기하곤 했다. ‘저출산과 직접 관련 없는 시대착오적 전시 행정’이라거나 우선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공무원 특권주의 아니냐’는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런 시비에 주눅 들지 말고 성남시처럼 뚝심 있게 밀어 붙여야 한다. 성남시는 20~30대 미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커플 매칭 행사를 지난해 7~11월에 다섯 차례 진행해 460명의 참가자 중 99쌍(198명)의 커플이 나와 매칭률 43%를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건 참가자 모집에 2571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이 6대1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수도권의 경우 성남시에 비해 어려움이 많겠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작게나마 상시화하면 좋겠다. 촌스럽다고? 그간 우리가 없애기 위해 애썼던 촌스러움을 어느 정도 회복해야 나라가 산다.

※이 기고는 지역신문인 영남일보(대구·경북), 중부일보(경기), 무등일보(광주·전남)와 함께 게재됩니다. 사외(社外)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