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시인)

#삭제

신년 벽두다. 지난해 마지막 날 한 일을 떠올린다. 별일은 아니다. 그냥 삭제일 뿐이다. 휴대폰에서 와글대는 온갖 정보들 대부분이 삭제됐다. 내게 온 문자들과 모바일 메시지 서비스, 예컨대 ‘카톡’의 온갖 ‘말’들과 ‘사진’들을 거의 삭제했다. 꼭 보관해야 하는 것들을 별도 저장한 다음 삭제하지만, 그건 얼마 되지 않는다. 평소에도 그런 정보들과 소식들, 온갖 사진들을 바로 바로 ?거의 보지도 않은 채- 삭제하곤 하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이런 온갖 ‘쓰레기들’을 마저 버리는 것이다. 왜 삭제하는가? 그런 것들이 쌓이다보니 차츰 휴대폰의 용량과 관계되는 일로 부담을 느낀 것이다. 묵은 정보들을 비워냄으로써 용량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새해를 맞는 ‘심리적 공간’을 넓히는 것이기도 하다.

삭제 이후의 허전과 씁쓸함은 어떤 슬픔과 이어지는 정서일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뭇 정보와 카톡 친구들이 주고받는 온갖 자기 자랑 수준의 소식과 과시, 과도한 인사들이 관계의 진정성을 보여주지 않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한 관계맺음의 말들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일방적으로, 무책임하게 들쑤셔진다. 그러한 관계 맺음은 다만 일상의 쓰잘데 없는 정보의 주고받음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런 것들을 주고받는 연관 속에 대책 없이 엮인 우리 모두가 슬프게 여겨지는 걸까?.

그렇다면 그 모든 걸 비워낸 후의 새해 아침은 고요한가?

그렇지 못하다. 새벽부터 나의 휴대폰이 울린다. 무음으로 해놓긴 해도 휴대폰의 진동이 계속 감지된다. 열어보면 수많은 새해 인사들과 자기 자랑, 자기 과시, 그리고 여기저기서 퍼온 온갖 정보들이 제 것인 양 ‘내게’ 퍼부어진다. 그러니, 그러니, 다시 삭제의 나날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슬픈’ 반복이다

#슬픔

앞에서 슬픔에 대해 잠깐 말했지만, 한 스님이 대화 중 "우리 사회의 모든 게 슬프다"라는 말을 해서 새삼 그런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어느 때든 슬픔 없는 때가 있었을까마는 요즘의 우리 삶의 모든 게 더욱 더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슬픔은 기막힌 일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탄식과 함께 일어난다. 무엇보다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사는 일이 그러하다.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야 하는 사회에서는 올라간 이도 슬프고, 올라가지 못하는 이도 슬프다. 누군가의 또는 사회 전반의 인정을 받으려고만 애쓰는 이들로 경쟁이 치열해져 상호 이해의 틈이 없는 사회. 허영과 질투, 경쟁으로 치닫는 사회. 우리 사회의 교육과 경제, 사회, 정치가 그러한 ‘걷잡을 수 없는’ 경쟁에만 골몰해 있다.

요즘 방송사마다 트롯 열풍과 함께 점수로 가수들을 뽑는 데 골몰하는 것도 상업성과 결탁한 과열 경쟁의 한 단면이다. 뭐든 일등을 해야 하고 최소한의 등수에 들어야 박수를 받는 사회. 지는 이의 아픔을 화면에 그대로 노출하면서 이긴 자의 환희를 부각하는 비정하고 잔인해 보이는 경쟁이 끊이지 않는다. 마치 검투사들의 사투를 보며 박수치는 고대 희랍인들을 연상케 하는 잔인함이 있다.

슬픔은 복잡한 감정이다. ‘탈력감, 실망감이나 좌절감을 동반하고 가슴이 맺히는 등의 신체적 감각과 함께 눈물이 나오고, 표정이 굳어지며, 의욕, 행동력, 운동력 저하 등이 관찰될 수 있다’(다음 백과)고 정의되기도 한다. 사랑, 우정, 의존, 공영의 대상이 없어졌을 때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노여움에 의한 그 사실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뇌에서 그 현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복받쳐 오는 감정’으로 솟구치기도 한단다.

우리 사회를 슬픔으로 파악하는 일은 곧 우리 사회 속의 삶이 자발적이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끊임없이 외세에 종속되고, 소외되며, 경쟁을 통해 외로움이 조장되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슬픔의 기능(예컨대 프로이드의 ‘카타르시스’ 같은)을 상실한 슬픔이다.

#백석

이런 가운데 진정으로 ‘고요한 세계’와 연민으로 가득 찬 ‘슬픔의 세계’는 존재하기나 할까? 연말과 연초에 걸쳐 백석의 시를 읽으면서 그걸 찾아내려 해본다.

백석의 시에는 참 ‘고요한 세계’가 있다. 쓸쓸함과 함께 슬픔도 있다. 앞에서 보인 그런 슬픔과는 다른 애잔하면서도 ‘환한’ 슬픔이다.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보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는 서두에 이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고 한다.

이 말에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사람만 그러한 게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뿐만 아니라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나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작고, 애처로운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백석의 슬픔은 가난한 마음만이 가질 수 있는 우주적 공감과 소통, 그리고 연민으로 설레는 감정의 표현인 것이다.

새해에는 이런 ‘환한’ 슬픔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우선 나는 백석의 애인 ‘나타샤’를 그려보며 슬픔과 동격으로 이해되는 그의 ‘가난한’ 사랑을 지지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라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의 첫 행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세속에서의 사랑은 가난 여부와 관련이 없지만, 시인은 그러한 모순되는 정황에 ‘푹푹’ 눈이 내리는 정경을 그려보임으로써 사랑은 존재의 모든 조건을 덮어 하얀 세상으로 변화시킨다고, ‘가난 속에 유지되는 마음의 순결성’을 강조(이숭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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