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강사

눈이 내린다. 매봉산자락 기슭에서 훅하니 불어오던 바람결에 가랑눈이 따라왔나 보다. 분분히 날리는 눈이 언뜻 춘삼월 낙화와 같다.

소담스러운 눈송이도 좋고, 바람 타고 흩날리는 풋눈도 그냥 맥 칼 없이 좋아서 뛰어다녔던 날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첫눈 오던 날이 문득 생각난다. 어머니가 홀연히 하늘길에 오르시고 두어 달 뒤 첫눈이 왔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두문불출하시며 말수를 줄이던 때라 첫눈으로 말거리를 찾았다 싶어 아버지께 달려갔다. 공허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에서 아버지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체 눈을 감고 계셨고 티브이만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 눈 와요. 밖에 첫눈이 와요."

자식의 호들갑스러운 소리에 슬쩍 쳐다보는 듯싶더니 아버지는 또다시 눈을 감으셨다. 내 말을 못 들으셨나 싶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흔들며 눈발이 날리는 창밖을 가리켰다.

"오면 어뗘…!"

갑자기 집안에 울리던 티브이 소리보다 더 큰 아버지의 고함이 자식을 향해 날라와 귀청을 때렸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만감이 교차했다. 첫눈을 맞이하던 잠깐의 설렘은 허공에 눈발처럼 흩어져 날렸다.

그깟 눈이 오는 것이 무에 그리 들뜰 일이냐는 아버지 식의 호령이었지만 현재 서글픈 당신의 처지를 그 한마디에 묵직하게 달아 뱉어내신 것이라 느껴졌다. 육십여 년 동안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던 아내가 홀연히 떠난 후 홀로된 외로움은 세상만사 어느 것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서글픈 외침 같기도 했다.

눈 오는 날, 비바람 치는 날에도 언제나 함께했던 그 숱한 날들이었는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상실의 가장 큰 아픔 안에서 무엇인들 새롭고 설레었을까. 스산한 겨울밤을 홀로 지새웠을 홀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지 가늠하지 못한 철부지는 그저 눈송이 하나에도 감격하며 들떴으니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었는지.

지척에 살면서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친정집이었지만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의 헹한 기운은 자꾸 자식의 발걸음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책감만큼 그날의 첫눈은 처연하게 창틀 위에 쌓여만 갔었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창가에 서면 설렘보다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목이 메어온다. 지금쯤 두 분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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