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애 미술사칼럼리스트

어느 날 노인이 되었다. 노인은 잠재력은 있지만, 생산성이란 잣대로 보면 가치가 별로 없다. 그래서 갈수록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사실 노인은 늙기는 했지만, 낡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기대수명이 60세에 불과했을 때가 얼마 전이다. 그때는 나에게 주어진 50~60년으로 인생 내러티브를 수행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러다 보니 무료하거나 심심할 여유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생이 끝나버렸기에, 노년의 삶이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100세도 아니고 100세+@ 시대다.

예전에 비해 적어도 40여 년의 시간이 선물이자 과제물로 주어졌다. 덤이라 여기기에는 부담도 만만치가 않다.

인생 2막의 수행 여부에 따라 노년의 행복지수가 결정된다고 하니 말이다.

노년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한다(근본적으로 경제가 해결될 경우). 돈을 벌 의무도, 양육할 의무도 없이, 모든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이 사용 권리와 의무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다양하게 시도를 해 보게 만든다.

그 다양한 방법 중에는 문화, 예술 활동도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 틀이 감옥인 줄도 몰랐다. 그리고 노년이 되고 보니 이 감옥이 불통의 원인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 집을 부수고 싶은데 방법을 전혀 모르겠다. 마음만은 자유로이 훨훨 날고 싶고, 노인이 아닌 어른으로 살고도 싶지만, 젊은이는 물론 동료들도 나를 거부한다.

이유는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란다.

문화예술은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세대 간의 공감대 형성은 물론이고 삶의 만족을 제공하는 에너지가 있다.

예술이 창조작업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투입된 예술작품은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노년의 삶의 주인인 나를 알아가고, 소통 가능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미술관관람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20여 년 전부터 거의 매년, 나는 수강생(서양미술사)들과 동경의 미술관을 다니고 있다.

목적은 서양미술을 일본에서 만나기 위함이다.

미술관을 자주 가다 보니, 흔하게 마주하는 풍경이 있는데, 일본 할머니들의 미술관관람이다. 그들은 점심 전에 미술관관람을 당연한 듯했다. 그림에 특별한 조예가 없어도, 나름의 방식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예술가와 소통하면서 행복해했다.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이고, 내 존재 자체가 행복임도 깨달았을 것이다. 노화를 늦추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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