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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투데이 김윤주 기자] ☞내 스무 살 시절, 참으로 멋진 오빠가 있었다. 외모·성격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누구나 그를 흠모하거나 선망했다. 나 역시 그 어린 양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오빠와 어찌어찌 문자를 하게 됐다. 지금 뭐 하냐는 내 물음에 오빠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했다고 말했다. 내용 자체는 매우 훈훈했다. 문제는 그의 ‘표기’였다. 그는 "엄마 도와주려고 설겆이 했어"라고 보내왔다. 설거지를 ‘설겆이’라고 말하는 훈훈한 오빠라니. 그가 북한 사람이 아닌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표기’는 내가 그를 ‘포기’하는 계기가 됐다.

☞내 맞춤법 강박증은 오래됐다. 기자가 되기 전부터 유별났다. 맞춤법을 틀리는 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기자를 업으로 삼아 ‘직업병’까지 더해졌다. 맞춤법이 파괴된 카카오톡 메시지는 너무나 괴로웠다. 그러다 보니 ‘언어 교관’이 돼버렸다. 가족이나 지인을 가차 없이 지적했다. 고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지적만 하다간 지인이 다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됐다. 띄어쓰기나 웬만한 ‘실수’는 괜찮았다. 나 역시도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맞춤법을 아예 잘못 알고 있는 경우였다.

☞대표적으로 ‘틀리다’가 있었다. 한 지인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 썼다. 그저 의견이 달라도 틀렸다고 말하니 늘 찝찝했다. 무언가 늘 잘못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오용(誤用)’에 다양성까지 ‘오염’되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지인은 ‘어차피’를 ‘어짜피’라고 쓰곤 했다. 그의 메시지에 집중을 하려다가도 ‘어짜피’라는 글자에 함몰되곤 했다. 심각한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 ‘역할’을 ‘역활’이라고 쓰는 지인도 있었다. 이력서에도 그렇게 쓰는 그를 보며 ‘활’을 쏴버리고 싶었다. 간혹 식당 메뉴판을 보고도 근질거렸다. 대표적으로 ‘찌개’를 ‘찌게’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외에도 ‘틀린’ 글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우리말은 참 어렵다. 섬세한 만큼 까다롭다. 그래서 기초부터 탄탄하게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잘 안되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 실태를 보면 그렇다. ‘SNS 세대’이다 보니 유튜브·OTT 영향을 많이 받는다. 별말을 다 줄인다. 그리고 신조어도 참 많다. 물론 우리 때도 줄임말과 신조어는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지금은 생활이 지배당한 기분이다. ‘갑통알(갑자기 통장 보니 아르바이트해야 할 것 같음)’이나 ‘당모치(당연히 모든 치킨은 옳다)’ 같은 말은 추리조차 어렵다. 물론 일부 신조어는 그 기발함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언어문화 발달이라는 순기능 또한 있다. 하지만 신조어에 길들여져 ‘바른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문제가 된다. 요즘 대한민국은 문해력까지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얼마 전 ‘사흘’·‘금일’·‘심심한 사과’ 논란을 봐도 그렇다. ‘우리말’은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김윤주 뉴스플랫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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