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1946~ )

몸을 나간 잠이 들어오지 않아
아들 방을 들여다보았더니
정강이가 침대 밖에 나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생각나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갈데없이 거실에서 ‘사랑과 전쟁’을 보았다
그래도 우는 건 대부분 여자였다
남자들은 왜 다 그 모양인지
사실 이 집만 해도 그렇다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길을 잃고 눌러앉은 게 여기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내도 모른 체한다
냉장고가 가끔 잠꼬대를 할 뿐
날이 새려면 멀었고
공연히 잠든 화분에 물을 주었더니
나에게 왜 이러느냐고 한다

중년을 훌쩍 넘긴 사내의 한밤 시간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국면이다. 잠은 몸을 빠져 달아나고 할 일은 없고. 하여 그때 그는 아들 방을 넌지시 들여다본다고. 궁여지책이라 할지. 아들의 정강이는 침대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그만큼 잠이 깊다는 것이겠지. 문을 닫고 거실에 앉아 심야에 틀어주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꽂는다. 하필 화면 속의 영화는 왜 ‘사랑과 전쟁’인가. 우는 건 대부분 여자라고. 사내는 그제야 철이 든 말을 한다. 그러나 여자가 우는 이유의 원인 제공은 다 남자라는 것. 스스로를 반성하는 듯하다.

우리 삶은 사랑으로 시작해도 모든 건 전쟁으로 귀착이 된다고. 한밤 중 잠이 깨어서야 비로소 사내는 지나온 시간을 아주 깊게 들여다본다. 나이 들면 왜 잠은 다 달아나는가. 모든 건 아내가 모른 체 해주는 덕으로 안전하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그런즉 믿을 건 이제 아내뿐인지 모른다. 그때 어둠을 긁어대면서 냉장고는 허튼 잠꼬대를 한다. 냉장고도 늙으면 몸이 성치 않아 온통 신음소리. 날 새려면 아직 멀어 뜬금없이 화분에 물이나 주는데. 화초도 왜 이러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래서 있을 때 잘 하라고 했나.

김완하(시인·『시와정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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