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2010년, 프랑스 작가 스테판 에셀이 93세에 ‘분노하라’를 출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나치 점령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으며,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그는 ‘내가 행복해짐으로써 남까지 행복하게 하는 것’을 일생을 통해 노력해야 한다는 눈부신 깨우침을 외치면서 세계적인 방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모 경제학자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출간하면서 분노의 시대를 열더니, 최근 감사의 일기 대신 분노의 일기를 쓴다는 ‘악인론’이 등장하고,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라는 ‘세이노의 가르침’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분노의 광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에셀과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분노는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는 본능에 가까운 자연스런 감정이다. 위협이나 공격에 저항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방어기제로 솟아나는 것이다. 이를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힘인 코나투스 (Conatrus)에 가깝다고 했다.

어떤 분노를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 그 사회의 격이 달라진다. 의학적 측면에서 분노는 코티졸을 증가시켜 위험에 대처능력이 일시적으로 급증하지만 지속되면 불안과 우울증, 분노조절장애를 일으킨다. 여성의 경우 배란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을 코티졸이 다 빼앗아 심신 안정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이 고갈된다. 불안, 생리불순, 자궁내막증식증, 난임의 원인이다. 증오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자라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분노가 확산되면서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고, 강한 사람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약한 사람 앞에서 화풀이하는 방구석 여포, 인터넷 터프가이들이 활기를 친다. 분노가 둔한 사람을 재치 있게 만들지만 그들을 가련하게 만든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떠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분노를 하려면 스테판 에셀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나카무라 슈지는 ‘분노는 나의 연구의 원동력’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동기부여를 주기도 한다. 이 정도 능력이 있을 때 분노는 코나투스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타인을 몰락시키는 방구석 여포가 될 수밖에 없다.

목계라는 말이 있다.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나무로 깍아 만든 닭’이다. 싸움닭을 키웠는데 처음에는 당장 덤벼들었지만, 좀더 가르쳤더니 다른 닭이 소리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눈초리 조차 공격적이지 않았다.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였고, 오히려 선한 눈빛까지 갖추었다. 모든 싸움닭들이 그 목계만 봐도 도망쳤다고 한다. 닭이 완전히 덕을 갖춘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가 공격해도 어떤 동요도 없고, 처다보는 눈은 마치 "목계"처럼 부드럽게 볼 뿐이다. 이것이 분노를 대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아마도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고 외친 것은 이와 같은 것 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성은 청년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치기 전에 부끄러움을 알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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