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시인)

#팔월

진초록의 능선 위로 흰 구름이 피어오른다. 여름 구름은 탁월하다. 더위가 뿜어내는 다채로운 세계의 기운이다. 속은 습기로 웅성거리고, 우레를 품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화안하니, 뭉게뭉게 환상을 피워 올린다. 얼마나 상큼하면서도 장엄한 광경인가? 그런 구름을 사랑한다고 하니, 천상 시인이라고 누군 말한다. 하지만, 나는 흰 구름도 좋아하지만, 동시에 여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상에 오른 탕국처럼 탁하고 뜨신 맛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해준다.

‘산딸기 주스와 응고한 우유, 레몬수가 있는 온유한 세계’와 ‘큰 화재와 유혈, 치정 살인의 세계’를 여름의 상반된 세계로 꼽은 산문가도 있다. 나는 그의 말마따나, "두 세계 사이 어딘가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여름은 그런 혼란의 와중이다. 그 기운이 뜻밖에도 무슨 상징처럼 흰 구름을 피워 올리기도 해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승용차 문을 열자 훅하고 느껴지는 더위. 차안의 온도계는 섭씨 47도를 나타낸다. 태양 아래 차를 세워둔 탓이리라. 서둘러 에어컨을 켜고, 창문을 열어 뜨거운 공기를 내보낸 다음 천천히 창을 닫는다. 온도는 차츰 내려가 34도가 된다. 에어컨 바람으로 실내는 냉각되어 비로소 혼미했던 정신이 말짱해지면서 쾌적감을 느낀다. 이런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교차된다. 아침에 아파트 앞 대로를 꽉 메우며 도시를 빠져나간 차들이 도착한 곳들은 대개 카페다. 도시 주변의 전원은 물론, 가까운 군과 소도시, 심지어는 바닷가 곳곳에 세워지는 대형 카페들에는 사람들이 빽빽하니 들어차 냉커피와 빙설 같은 걸 시켜놓고, 밖을 내다본다. 그러다 나오면 온몸을 감싸는 더위에 어찔해진다.

올해 더위는 더욱 맹렬해서 이열치열이라는 말마저 쑥 들어갈 지경이다. 우짜든지 더위를 피할 궁리만 한다.

#이상기후

비가 오래 동안 내리더니, 겨우 그친 듯하다. 또 언제 쏟아져 내릴지 불안하다. 느닷없이 쏟아지고 양도 예상외로 많아 피해가 유난히 컸다. 산사태와 홍수 피해가 심했다. 손녀가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장마라는 말을 안 쓴대요. 그 대신 우기라고 한 대요." 날씨가 하도 이상하니 어린 애마저 심상찮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온대에서의 기상 주기가 난조를 이루면서 아열대 현상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맹 더위도 그렇다. 해마다 더해지는 듯하다. 새만금에서 열리는 세계 스카우트 대회가 열기로 달구어져,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온열 환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코로나 환자도 잇달아 발생, 조기 종료 목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영국과 미국 팀 등은 대회 중 조기 철수를 하여 주최 측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열대야와 찜통더위가 한반도 전역을 더욱 더 달군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면서 실은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기록적인 폭염, 폭우로 인한 홍수 등 극단적인 기후 현상이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과학자들도 놀라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오랫동안 예상했는데도, 올해는 특히 극단적이면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이상기후로 북대서양의 해수면 온도 상승과 남극 대륙의 얼음 감소가 눈에 띄게 나타난다. 지구 전체의 해수면 온도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달 말의 전 세계 해수면 평균 온도는 섭씨 20.96도로 지금까지의 측정 수치로는 최고치에 이르렀다. 한 해양학자는 북대서양 해수면 온도 상승은 엘니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매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온의 급격한 상승은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병원균으로 인한 산호초 질병이 늘어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산호초의 폐사는 바다 생물에게는 치명적이다. 지구 온난화 추세가 계속된다면 결국 산호초 소멸과 빙하 감소에 따른 광범위한 해수면 상승이 나타날 전망이다. 아마존 열대우림 같은 중요한 생태계의 소멸도 기후 변화의 요인으로 꼽힌다.

#피서

맹 더위를 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많은 이들이 냉방 잘 된 카페에서 오글거릴 뿐인 게, 우리 같은 늙은이들에게는 호감이 갈 리 없다. 이따금 집 부근에 사는 친구들과 한적한 단골 찻집에 앉아, 나름 지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래, 욕심을 줄이는 게 먼저야"라고 한 친구는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제대로 해야지"라면서 그걸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다 돌아와 집에서 에어컨을 켰다가, 선풍기를 돌리다가 찬물을 몸에 끼얹기도 하면서 버틸 뿐이다.

신문과 잡지들을 뒤적이면서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읽는 것으로 피서를 대신하는 게 우리 같은 글쟁이들이 고작 하는 일이니 이 또한 가소로울 뿐이다. 그래도 사뭇 진지하게 살펴보는데, 그 소식들에도 어두운 전망이 더 눈에 띈다. 쳇GPT라는 혁신적인 인공지능(AI) 출현에 세계가 아연 긴장하는 모양이다. 지난해 문단의 관심을 끈 인공지능 시집에 이어, 한 잡지의 이번 여름 호에서는 ‘챗GPT 시대, 문학의 미래’라는 주제의 특집을 마련했다. 인공지능의 역사가 아주 짧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 문단(특히 젊은 세대의 문단)에서는 인공지능을 통한 작업이 꽤 이루어지고 있는 게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벌써 인공지능에 대한 부작용과 후유증이 대두되는 모양이다.

가령 이런 소식. 미국 작가 8천 명이 소속된 미국작가조합이 생성 형 AI ‘쳇GPT’의 개발사인 오픈AI, 메타,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스태빌리티AI 등을 상대로 저작료를 요구하고 나섰다. ‘저작권이 있는 수백만 권의 책, 에세이, 시들은 AI 시스템을 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요금 청구서가 없는 끝없는 식사를 제공한다"면서, 이는 저작권을 무시하는 처사로 이에 상응하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이외에도 과학과 일상이 맞이할 인공지능의 광범위한 활용여부에 따라 가공할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상기후에 못지않게 더욱 미래를 불안하게 내다보게 하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이래저래 올해는 더위 견디기는 물론, 나름의 피서에서 조차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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