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현 ETRI 실감소자연구본부 책임연구원

책 훈민정음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나랏말ㅆㆍ미’로 시작하는 유명한 어제 서문이고 2부는 자모의 구성, 소릿값과 예제에 대하여 설명한 해례부이다. 3부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정인지의 서문이다. 임금의 권위와 신하의 겸양이 고려되어 이 서문은 훈민정음 뒷부분에 배치되었다. 서문의 내용은 사뭇 진지하고 철학적이다.

이 서문의 앞부분은 글씨를 만들어 자연의 소리를 나타내고 글씨를 통해 천지자연에 담긴 뜻을 밝힐 수 있다는 철학적인 사유로 시작되고 있다. 이 내용을 확장하면 삼라만상은 연결고리가 있으며 연결고리를 통해 역할이 부여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자연의 구성요소들이 조화롭게 각자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때 생태계에는 건강하게 생동감이 넘친다.

2017년 6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세상을 변화시킨 10가지 발명품의 목록을 발표했다. 10가지 발명품은 인쇄술, 전등, 비행기, 개인 컴퓨터, 백신, 자동차, 시계, 전화기, 냉장고, 사진기이다. 필자는 여기에 화학비료, 상·하수도와 전기기술을 더하고 싶다. 화학비료는 인류를 만성적인 기아에서 건져낸 일등 공신이다. 상·하수도를 통해 위생 수준이 크게 좋아져 사망률은 더욱 낮아졌다. 전기발전과 이송은 떠올릴 수 있는 현대의 모든 분야를 가능케 하였다. 어쩌면 필자도 이 발명의 덕택에 지금까지 큰 병, 큰 위험, 굶주림 없이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슐린이 발명된 1920년의 세계인구는 20억명 수준이었지만 2023년의 인구는 이미 80억명을 돌파하고 있다. 이는 분명 농업, 위생, 의약에 관련된 발명의 덕택이다.

발명의 효용이 확인되면 발명품은 대량생산이 되어 일상용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량생산 과정에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요소가 반드시 등장한다. 바로 오염과 에너지 남용이다. 특정한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화학공정이 요구되며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독성 오염물질이 사용되고 배출된다.

전기자동차 모터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희토류 자석이 필요한데 희토류의 제련과정은 환경재앙 그 자체이며 치명적인 방사능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에너지가 남용 수준으로 다량 요구된다.

화석연료로 인한 기후변화는 기정사실이며 원자력은 아직까지 고준위 방사능 물질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발명은 생태계 고려가 없는 일방적인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생태계 파괴와 폭발적 인구증가는 2차대전 이후에 동시에 일어났다. 돌려 말하면 현재의 편의와 풍요를 가능케 한 대량생산된 발명품들은 생태계 파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물론 원시시대 회귀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지속 가능을 위해서는 생태계 보존이 크게 공론화되어야 하며 환경 우선 정책이 강제성 있는 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지구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커즈 와일은 인간과 인공지능이 합일에 도달하는 특이점 시점에서 심오하지만 낙관적인 변화가 오리라고 예측하였다. 인공지능이 일상의 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시점에 이 예측이 가볍지 않다. 필자는 핵융합 에너지 성공이 특이점의 개시를 알리는 소식이 되길 기대한다. 이제 더운 여름이다. 생태계를 위하여 냉방기를 끄고 정인지가 사용했을 법한 부채를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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