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국제정치학 교수·전 국립외교원장)

대북 강경책부터 친미·친일 외교까지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정책을 특징짓는 용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치 외교’가 단연 부각된다. 이는 일견 외교에 있어 도덕과 정당성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idealism)로 읽힐 수 있다. 가치 외교가 표방하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 법치 등은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과연 현재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를 도덕주의 또는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윤석열 정부가 모델로 삼는 동시에 연대를 외치는 미국의 경우를 살펴봐야 한다.

2차대전 이후 세계 패권국으로 본격 등장한 미국은 건국이념인 기독교적 가치에 입각한 이상주의가 대외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미국이 외교에서 도덕적 원칙을 내세우는 것은 당파성을 뛰어넘지만,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 상대적으로 더 강조해왔다. 1차대전 이후 윌슨주의를 뿌리로 1970년대의 카터와 1990년대 클린턴 정부에서 이상주의 대외정책은 전면에 부상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상주의는 정착에 실패하고, 오히려 내세운 이상과 미국의 실제 행동의 격차는 위선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주의는 단지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국제정치의 주류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주의(realism)는 외교를 철저하게 국익을 추구하는 영역이라고 보기에 도덕이나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상주의를 강하게 비판해왔다. 이상주의가 가진 근원적 정당성만큼이나 국익 중심의 외교를 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의 원칙도 미국 외교의 중요한 축을 구성해왔다. 가치 절대론자처럼 행동하는 윤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에 실용주의를 내세웠었고, 지금도 자칭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라며 실리외교를 앞세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 정체성을 가치로 못 박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자유’다. 지난해 유엔 연설에서 자유를 21번이나 언급한 것이나 최근 방미 중에 하버드대학 연설에서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라는 연설에서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와 전체주의의 부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다고 규정하며 한국이 미국과 함께 가치 외교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세계를 자유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자유가 없는 ‘권위주의 연합’으로 나눈 뒤, 한국이 전자의 진영에 선명하게 가담해서 중추적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반복적으로 천명해왔다.

겉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고 정당성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매우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진영논리를 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영논리는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세계평화에도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철학자 박구용은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하는 자유를 "모순적 자유로서 자신이 국민에게 시혜 베풀 듯이 사용하고, 끊임없이 적들을 규정해 자유를 제한하며, 그것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라고 갈파한다. 윤 대통령이 부르짖는 자유의 폭력적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이런 자유는 권력자의 독선으로 무장해 오히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윤대통령이 가치를 들먹일 때는 대외적으로는 중국, 북한, 러시아를 욕할 때만,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전임 정부, 야당, 노동계, 진보적 시민단체를 적대시할 때만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그런 면에서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선이 악의 세력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극우적 세계관을 닮아있다.

세계에는 약 250여 개국이 있고, 유엔 정식 회원국은 193개국이다. 윤대통령의 연설에서처럼 유엔의 핵심 가치가 자유이고, 평화가 뒷전으로 미뤄진다면 유엔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즉, 유엔에서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가치 기준으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할 수 있는 국가는 많아야 40~50개국 정도다. 만약에 권위주의 정부를 모두 배제하면 근본적으로 국제협력은 작동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평화나 기후 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처는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상에서 진영논리는 훨씬 더 위험하다. 국익은 실종되고, 우방 진영에는 굴욕의 관계로 가고, 북방의 주변국과는 적대의 관계로 빠진다. 이미 한일관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고, 최고의 외교 안보 사령탑인 국가안보실은 미국의 도청 시인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항의도 없으며,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없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133조를 투자하고도 반도체와 배터리에서 규제받는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반면에 적으로 규정한 국가들에는 관리는커녕 도발 수준으로 관계를 악화시킨다. 중국의 가장 민감한 대만 문제를 건드려 관계 악화를 자초하고,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한반도 평화라는 가치는 가짜로 몰아붙이고, 전쟁불사론과 선제타격론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갈수록 우경화하는 윤 대통령에게서 트럼프의 모습이 투영된다. 안팎으로 적군과 아군을 철저하게 분열한 다음,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정치적 결집을 구축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패턴이다. 그의 원래 성정인지,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참모들이 의도적으로 국내정치적 계산에서 트럼피즘을 벤치마킹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모두 다 해당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윤석열 정부가 가치를 말하지만, 철저하게 이념에 경도된 이념 외교를 한다. 이념 외교에 덫에 걸려 한반도 평화는 위협받고, 동북아의 안정은 흔들리며, 세계평화는 멀어지고 있다.

안보 논리에 짓눌리기 쉬운 분단국가, 그것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에서 눈부신 민주화를 이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50년 전 냉전체제의 이념이 부활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국내정치적 계산기만 두드리는 반가치적, 그리고 반역사적인 이념 외교를 중단하고 유턴하는 것만이, 한국 외교와 대한민국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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