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얼마 전 대구의 어느 백화점에 갔다가 희한한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친절하게도 층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지하 주치장만 우리말이고 나머지 지하 2층부터 9층까지 한 층도 예외 없이 몽땅 외래어가 아닌가. 이렇게 우리말을 하나도 안 쓴 안내판은 처음 본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멀리하고 구태여 영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그 중 대부분의 말은 우리말로 해도 충분한데. 이래야 물건이 더 잘 팔리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아파트 이름도 요새는 외래어 투성이다. 예전에는 우리말이나 한자 이름의 아파트가 많았는데 요새 짓는 아파트 이름은 온통 외래어 홍수다.

특히 고급 아파트일수록 어느 나라 말인지, 무슨 소린지 모르는 외래어가 난무한다. 시골 사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 못찾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거야 물론 농담이지만 하여튼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가 너무 많은 건 사실이다.

TV 방송국의 뉴스를 보면 뉴스 데스크, 이슈 브리프, 팩트 첵크 등 외래어가 너무 많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쟁점 정리, 사실 확인 등 우리말을 쓰면 좋을 텐데 꼭 외래어를 써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들 중에서 일상대화 중에 외국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심심찮게 본다.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우리말 반, 외국어 반 정도로 많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게 보면 오랜 외국 생활의 버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마음먹기 달린 일이지 버릇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 친구 중에 고3 때 ‘돼지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미국 최고의 공과대학인 MIT를 졸업하고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 대학 전자공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재수 교수가 있다. 고화질 TV를 개발하는 등 많은 연구업적을 자랑하는 국보급 학자다. 임교수를 미국이나 한국에서 아주 가끔 만나는데, 이 친구는 대화 중 거의 영어를 쓰지 않는다. 미국에서 산지가 50년이 넘었는데도 그렇다. 그러니 몇 년 외국 유학했다고 외국어를 줄줄 입에 달고 사는 지식인들은 버릇이라기보다는 허영심, 또는 과시욕이 아닐까. 하나 덧붙이자면 이런 부류 치고 실력이 있는 사람을 별로 못 보았다.

나는 일상 대화 중 영어 사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말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한 학기 내내 강의를 해도 외국어, 외래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강의를 했다. 그리고 우리말 중에서도 어려운, 현학적인 표현을 삼가고 쉬운 말만 골라 쓰려고 노력했다. 나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경북대학교 오는 길에 칠성시장에서 길바닥에 앉아 채소, 콩나물 몇 단 놓고 파는 할머니들을 봤을 것이다. 그 할머니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해야 한다. 여러분은 운이 좋아 대학에 왔지만 항상 겸손해야 한다. 좀 배웠다고 괜히 어려운 말 쓰고, 외래어 쓰고 그러면 못 쓴다."

외국어, 외래어 남용은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반대로 외국어, 외래어를 너무 안 쓰는 것도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고2 여름방학 때 신문을 보니 런던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북한이 우승후보 이태리를 격파하고 8강에 진출했다는 놀라운 뉴스가 났다. 이것은 세계 축구계를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고 골을 넣은 박두익 선수는 일약 영웅이 됐다. 나는 북한 대 포르투갈의 8강전 경기 중계방송을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런던과 한국의 시차를 계산하니 경기 시간이 한밤중이었다. 북한 방송을 틀었더니 전파 방해가 심해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그래도 워낙 중요한 경기라 잠 안 자고 열심히 들었다. 당시는 북한 방송을 들으면 잡혀가던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북한의 아나운서의 용어 사용이 희한했다. 영어를 전혀 안 쓰고 순수 우리말만 썼다. 오른쪽 공격수, 왼쪽 수비수, 벌칙 차기(페널티 킥), 모서리 차기(코너 킥), 이런 식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신기하고 민족 자존심이 엄청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기 내용은 북한이 처음에 3:0으로 앞서 가 이긴 줄 알았는데 포르투갈의 불세출의 영웅 에우제비오(별명 검은 포범)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바람에 3:5로 역전패했다.

한겨레신문은 외국어, 외래어, 한자 사용을 원칙적으로 배척하고 순수 우리말을 고집한다. 예를 들어 IMF를 아이엠에프라고 쓰고, TV를 티비라고 쓴다. 글쎄요. 나도 외래어를 아주 싫어하지만 이건 동의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외국어, 외래어는 인정하고 써야 한다고 본다. 외국어, 외래어를 너무 남용하는 건 꼴불견이지만 최소한의 사용은 불가피하고 편리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외래어는 남용하는 것도 곤란하고, 배척하는 것도 곤란하다. 적당히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끝으로 말이 난 김에 외국 인명 표시에 대해 한 마디 하자. 우리나라의 교육부 산하에 무슨 위원회가 있어서 외국 인명 표기법을 정한다. 여기서 정한 바에 의하면 경제학자 케인즈, 맑스는 케인스, 마르크스로 써야 한다. 케인즈의 발음을 사전에 찾아보면 절대로 시옷 발음은 아니고 지읒 발음이 확실한데. 그래서 케인즈가 맞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무조건 케인스라고 우긴다. S는 무조건 시옷으로 써야 한다고 정해놓았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S가 시옷 발음일 때도 있고. 지읒 발음일 때도 있다고 학교에서 다 배워놓고.

또한 맑스를 마르크스라니 이상하기 짝이 없다. 일본어는 발음이 제한돼 ‘마르쿠스’라고 이상하게 표기하는데 우리는 좋은 한글을 두고 마르크스가 뭔가. 더구나 마르크시즘, 마르크시스트 하면 완전 이상한 엉터리 발음이 된다. 나는 그래서 글을 쓸 때 케인즈, 맑스로 쓰는데, 교육부 원칙을 무시하지 못하는 출판사, 신문사와 항상 씨름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오래 전 이 위원회에 케인스, 마르크스는 틀렸고, 케인즈, 맑스가 맞다고 주장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한참 뒤 간단한 답이 왔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했으나 이유 없어 기각함.

기가 막혔다. 이런 엉터리 원칙이 요지부동 바뀌지 않음은 참으로 문명국가의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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