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선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충북지역위원회 회장

오래전 다른 지역에서 살 때 오카리나 연주봉사단에서 연주 봉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합창단이 없던 지역이라 6·25전쟁 기념식을 할 때면 오카리나봉사단원들이 합창단 대신 참석했다.

기념식에서 전쟁미망인 모임의 회장님이 전사자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을 읽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그녀의 절절한 사연에 눈시울을 붉혀 유난히 인상 깊었다. 그 후 이사를 하면서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우연히 그 지역 지인을 만나 10여년 만에 미망인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고, 평생 갖은 고생 하면서 악착같이 유복자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분이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아들은 성공 가도를 달리 수 있었지만, 아들에 대한 애착만큼 며느리와는 원만한 관계 유지가 어려워 노년이 무척 힘들었다는 얘기에 짠하고 안타까웠다. 오직 유복자 아들만 믿고 평생을 버텨온 미망인이 나이 들수록 굳어진 아들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지 못해 며느리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아들이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는 전언이다.

6·25 전쟁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국의 미망인과 유복자가 어디 그들뿐이었을까? 모든 부부가 다 백년해로할 수는 없지만 꽃 같은 나이에 남편을 전장에서 잃고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그분들의 삶이 전사자만큼 애달프다. 수많은 전사자와 미망인 유복자들이 모두 그들처럼 살지는 않았겠지만. 주변에서 고부간의 갈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소통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상담을 통한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다면 아까운 아들의 목숨은 거두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분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미망인은 아흔을 넘겼고 유복자들도 일흔을 넘겼을 세월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들의 삶 속 드러나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우리가 헤아리고 보듬으며 여생이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비단 6·25전쟁뿐만 아니라 천안함 피격사건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국가적 예우와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지원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헤아리고 상담을 통해 치유할 수 있어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희생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가족들이 고인에 대해 자랑스러운 마음과 함께 건전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순국선열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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