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국제정치학 교수·전 국립외교원장)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이 형사 법정에 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과거 성인 배우와의 스캔들이 2016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져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용 합의금을 줬다. 그 과정에서 회삿돈을 유용했고, 회계 장부까지 조작하는 등 34가지 불법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한국에는 이미 패턴이 되다시피 한 전직 대통령의 기소지만, 미국은 지난 250년간 46명의 대통령 중 전례가 없다. 사건 자체로도 충격적이지만, 트럼프가 내년에 있을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일단 그의 법원 출석 장면만으로도 전 미국이 들썩거렸다.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미국의 주요 방송들은 헬기까지 동원해 생중계하는 장면은 과거 본인의 이력 중 하나였던 ‘리얼리티 쇼’를 연상하게 했다.

역대 첫 기소라는 치욕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화제성만큼은 트럼프를 다시 미국정치의 무대 중심에 올려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선동의 대가답게 자신의 내년 선거 출마를 막기 위한 바이든과 민주당의 마녀사냥과 정치적 박해로 몰아가면서 지지층 결집에 나서고, 언론 매체들 역시 이슈몰이 중이다. 기소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저항하라’라는 선동 메시지를 올렸다. 재임 때도 자신을 향한 지지나 호감을 올리는 정치보다 상대 세력에 대한 증오나 비호감을 극대화하는 트럼프의 전형적인 정치 문법이다. 법정 출두 후에 플로리다 자택에 돌아와서도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또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 기소 이후 일주일간 후원금이 1천2백만 달러에 달했다.

이번 사건으로 희비가 갈린다. 울고 있는 사람은 플로리다 주지사 론 디센티스일 것이다. 작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지원했던 소위 ‘트럼프 키즈’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낙선했고, 상원을 민주당에 넘겨줌으로써 영향력이 약화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따라서 대안으로 디센티스가 차기 공화당 대선후보로 급부상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난 3월 30일~31일에 실시한 야후 뉴스와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트럼프는 52%를 차지해, 21%인 디센티스를 압도적으로 따돌렸다.

반면에 겉으로 표정 관리하면서 속으로는 웃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바이든일 것이다. 트럼프의 기소 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말을 아끼고 있지만, 바이든은 내심 트럼프와의 재대결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지난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을 가진 트럼프를 꺾었다면 재대결에서도 이긴다는 자신감은 물론이고, 재선 가도에 가장 큰 장애물로 꼽히는 고령 논란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45세의 디센티스보다는 비슷한 나이대의 트럼프가 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은 확실한 표심이긴 하지만, 당선을 위해선 중도층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이번 사법리스크는 트럼프에게 밑지는 장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부터 1년 7개월이 남은 대선까지 의회 폭동 선동, 기밀문건 유출, 그리고 조지아주 선거 개입 건까지 더해지면서 계속될 논란은 중도층의 피로도를 가중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공화당 전체가 트럼프가 던진 덫에 걸려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당내에서는 여타 후보를 압도함으로써 치열한 경선 없이 본선에 나간다고 하더라도, 본선 경쟁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덫에서 벗어나야 공화당이 살 수 있다고 믿는 당원들은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고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법치국가 미국에서 누구든 잘못하면 법의 심판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며, 여기에는 돈이든, 권세든, 전직 대통령이든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틀린 말이 결코 아니지만, 미국 사회의 현주소는 이런 정도의 당위론으로 가리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극단적으로 양분된 미국 사회의 추락은 날개가 없다. 양당 체제가 초래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정치 구도의 전형이다. 국력의 약화와 중국의 도전으로 패권국가의 힘은 줄어들고 리더십은 신뢰를 잃어왔다. 2016년 트럼프는 권력을 위해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갈라쳤고, 대외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와 패권주의의 민낯을 노출했다. 바이든의 승리와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회복되지 않았으며, 민주당 정권 역시 트럼피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재선이 무산된다고 하더라도 분열과 배제의 정치는 앞으로도 미국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후임자에 의해 투옥되는 개발도상국 식 ‘승자의 정의’처럼 보일 수 있다."라는 타임지의 평가에 한국이 곧바로 투영된다.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피하려고 당이 다른 전직 대통령 기소를 자제해 왔던 전통이 깨졌다는 탄식인데, 과연 미국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있어 두 극단의 역할을 해왔다. 배우고 따를 민주주의의 모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국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독재자를 옹호하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후퇴시킨 적도 많았다. 이제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이 양국은 매우 닮아버렸다. 제왕적 대통령도 그렇고, 지금처럼 극한의 당파적 대립의 정치가 국민을 분열하고 선동하는 것은 판박이다.

현 바이든 정부의 대외전략은 트럼프 2.0이라고 불릴 만큼 미국 우선주의가 두드러진다. 거칠고 무식했던 전임 정부와 비교해 가치로 포장한 위선이라는 차이일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함께 사는 세계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해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남은 힘을 끌어모아 동맹과 우방의 팔을 비틀고, 사방에 적을 만들고 압박하는 난폭한 존재가 되어있다. 여전히 한미동맹의 유용성은 있지만, 무조건 수용은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익을 놓고 치열하게 협상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플레이션감축법안, 반도체법안, 그리고 최근의 안보실 도청 사건들은 명확하게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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