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중세시대에 인간의 이기심은 죄악으로 취급 받았다. 근대에도 토머스 홉스 같은 사람은 개인의 이기심을 견제하기 위해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통해 "모든 사람은 타자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진단했다. 인간의 본성에 연민과 공감의 원리가 존재하기에 인간의 이기심은 남들과 더불어 사는 원리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공감은 애덤 스미스에게 있어 도덕의 출발점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마을 공동체가 개인의 관심 영역의 전부였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만 동참하면 됐다. 오늘날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식들을 접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의 감정, 경험, 행동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공감 능력이 현대사회 구성의 핵심원리로 등극하고, 현대 인류의 필수 생존 조건이 된다.

공감(empathy)이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 또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상상해내는 능력이다. 공감을 마치 선을 행하는 원동력처럼 생각할 정도로 최근 혐오와 차별을 해결할 해법으로도 자주 언급한다. 현대인에 있어 공감 능력은 또 하나의 지능으로 평가되고 있다. 학교폭력(학폭)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연예인, 스포츠계 스타, 사회지도층 자녀들의 학폭 사건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학폭 피해자는 폭력의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엄이나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되는 무서운 사건이지만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공감 능력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들 모두가 공감 능력이 너무 특출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스포트라이트 효과가 있다. 극심한 감정이입으로 자기가 속한 집단(in-group)에 강하게 공감하지만 타집단(out-group)의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착각하는 비인간화 현상이 일어난다. 타집단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일어나는 원리다. 심리학자 블룸의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이 반사회적 행동을 부추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며,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통해 지적한 ‘공감이 폭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사실 평범한 공감 능력을 가진, 심지어 타인에게 무심한 사람들은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 학폭도 우발적 사건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감 능력이 과잉된 사람들은 우리 편과 남으로 구분하고, 내 편이 아닌 타자를 사람 이하로 폄하하게 된다. 과잉 공감이 폭력이 되고, 학폭이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감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는 공감 정치인의 화신 오바마의 비유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다. 나 자신을 먼저 보라, 그리고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것이 공감 과잉 시대, 폭력에 맞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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