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수필가

파일, 마우스 오른쪽 클릭! 삭제, 휴지통으로 이동 .../휴지통, 마우스 오른쪽 클릭! 휴지통 비우기 클릭!/"이 항목을 완전히 삭제하시겠습니까." 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의 기억회로가 삭제된 용량만큼 속도가 빨라진다. 반면에 인간의 기억은 영구히 삭제가 불가능하다. 망각해버린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진의 음화처럼 의식의 심층에 있다가, 우리 삶에 불쑥 나타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보화시대에 산다. 그래서 인간은 뭐든지 기억하고, 답습하며, 암기하고, 숙지하려 애쓰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 때때로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자동차 열쇠를 어디다 두었는지 허둥거리고, 소중하게 넣어 둔 물건들을 기억하지 못해 난감한 일이 많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천, 수 만개 이상의 정보를 받고 처리한다. 찰나의 망각마저 없다면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느라 불행한 현재를 살지도 모른다.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 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에 몰입하면 순간 망각의 늪에 빠진다. 애쓰지 않아도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들이 밀려난다.

망각은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내게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영화를 보며 나의 시선을 뺏는 장면에 집중하면 어느새 영화 속 인물에 동화된다. 새벽이 오는 줄 모르고 책을 보거나 글을 쓰다보면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현재의 나는 사라지고 만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망각하는 자야말로 행복한 사람..." 요한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이다. 그렇다. 망각은 삶에 어둠이 되기도 하고 빛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가물거리는 기억과 마주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 ‘무엇인가를 망각한다는 것’이 서글픔만이 아니다. 살다보면 좋은 일만 아니라 잊고 살아야 할 일, 잊고 싶은 상처도 많다. 아픈 흔적을 다 기억하고 산다면 삶의 무게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망각의 시간이 있어 아픈 기억들이 옅어지고 헤진 상처도 아물게 된다.

망각은 또 다른 무언가를 채우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나를 비우는 신의 선물이다. 감사히 받으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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