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정의(Justice)란 정의(define)하지 않는 것’을 주장한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영미권에서 고작 10만 부밖에 팔리지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200만 부나 팔렸다. 한국인이 정의와 불공정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반증하지만, 유럽에서 퇴조를 보이던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국에서는 폭발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와 함께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 다르다는 전제하에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만족시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내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조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남성 중심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적인 가치가 아닌 다양한 계층의 문화가 대두되고, 크로스오버, 젠더리스, 동서양문화의 결합, 탈 장르 등 다원화된 사고방식은 일상화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상대주의다. 나도 옳고 너도 옳고 모두가 옳다는 입장으로, 무척 포용적이다. 황희 정승의 일화가 있다. 황희는 한 종의 말을 듣고 "네 말이 옳구나", 다른 종의 말을 듣고도 "네 말도 옳구나"라고 했다. 이런 황희 정승의 태도를 보고 부인이 나무라자 "부인 말씀도 옳구려"라고 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가 따로 있고, 절대적인 진리나 객관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엌에서는 며느리가 옳지만,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진리인 것이다.

사실 황희 정승의 상대주의는 불가지론과 통하는 것으로, 사람이 진리 그 자체를 아는 건 참으로 어렵다는 겸손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교만함이 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단에 다다르면서 진리가 사라진 세상, 참과 거짓의 구분이 희미해진 세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포스트투루스(탈 진실) 세상이 되고 있다. 듣고 싶은 것만 들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힘을 발휘하면서 가짜 뉴스도 대안적 진실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극단적 다원주의를 불렀다면, 포스트투루스는 극단적 혐오, 흑백논리를 낳고 있다.

2023년은 계묘년, 검은 토끼해다. 유례없는 경제 위기가 세계 곳곳을 엄습하고, 코로나 여파가 또 다른 양상으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강한 힘을 행사하면서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 탈 진실의 사고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토끼가 어떤 동물인가? 12지간 중 굴을 3개 파 놓는다는 교토삼굴의 지혜를 가졌고, 토끼와 거북이 동화처럼 굳이 남을 이기려 애쓰지 않으면서 충분히 행복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적 동물이 아니던가?

검은 토끼의 힘을 믿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보자. 아마 내년에는 세계 6강의 대한민국이 아닌 세계 4강의 대한민국으로 ‘래빗점프(토끼점프)’돼 있을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진실은 필요 없다. 이기면 된다’는 탈 진실의 사고를 뽑아내고, 흑백논리와 적대적 사고를 걷어찬다면 바로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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