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업성장지원부장

많이 알려진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사막과 정글, 그리고 무서운 짐승들로 가득한 아프리카 땅에서 길동무 없이 혼자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계하는 금언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 경제 상황을 보면 위험한 곳이 아프리카 땅만이 아니다. 아마존, 테슬라, 애플 등 내놓으라는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들조차도 속속 대량 해고나 신규 채용 중단에 나서고 있다. 이런 일들이 먼 나라 만의 일이면 좋으련만 얼마 전 만났던 금융 전문가 한 사람은 "아직 진짜 위기는 오지 않았다"라며 앞으로 다가올 경제 상황을 근심하고 있었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라 그이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 속담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이런 가운데 서울대 소비트랜드 분석 센터가 발간하는 ‘트랜드코리아 2023’에서 10대 사회 트랜드 중의 하나로 ‘인덱스 관계’를 선정했다. 소수의 친구와 우정을 쌓아가는 것이 예전의 관계 맺기 라면, 요즘의 관계 맺기는 관계의 ‘목적’에 따라 수많은 인간관계마다 각종 색인(인덱스)을 뗐다 붙였다 하며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관계 맺기의 방식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류된 관계는 목적의 달성 여부에 따라 언제든지 인덱스처럼 뗐다 붙였다 하면서 효율적으로 ‘관리’된다. 또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도, 섭섭함을 느끼지도 않을 정도로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속에서도 나의 목적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에 의해 일방적으로 관계가 정리될 위험은 피할 수 없다. 함께이지만 언제든지 혼자로 남을 수 있는 관계라고나 할까? ‘트랜드코리아 2023’에서는 이러한 인덱스 관계를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의 출현으로 전 세계의 불특정 다수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환경에 사람들이 노출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현상은 중소기업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중소기업 수요 맞춤형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해 오던 많은 일들이 인덱스 관계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실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별로 정부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맞춤형으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점에서 목적이 분명하고, 도움을 받은 중소기업은 물론이거니와 문제해결을 도와준 정부와 지원기관들도 선뜻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 원하던 지원이 마무리되면 관계에 붙여졌던 인덱스와 함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곤 한다. 영락없이 ‘인덱스 관계’이다. 목적이 달성되는 시점까지만 ‘함께’인 일시적 관계가 어쩌면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지원기관 사이의 숙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혹자는 이렇게 하지 않고 동일 기업에 장기간 지속 지원하는 것은 ‘특정 기업에 대한 지나친 특혜가 될 수 있다’라며 경계한다. 지원을 원하는 기업의 수는 많고,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돼 있으니 그런 주장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막대한 지원과정에서 다수 좀비기업이 왜 출현했는지 그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지원받은 중소기업과 지원기관 간에 장기적인 관계에서만 형성될 수 있는 ‘신뢰’라는 자산을 굳이 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제한된 여건하에서 모든 중소기업지원을 장기적 관계에 기반한 지원 형태로 전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가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전략산업 군에 속한 기업들만이라도 지원기관들이 힘을 보태어 먼 길을 함께 가주면 좋겠다. 분명 그 길 끝에서 밝은 국가의 미래를 볼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