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힘찬 ETRI 플렉시블전자소자연구실 선임연구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한 프로게이머의 인터뷰 내용을 기자가 극적으로 재해석해 화제가 된 문구이다. 데뷔 이후 근 10여년 결승에 오르지 못했던 이 선수는 1차전 패배 직후 담담한 어조의 이 인터뷰 이후 상대 전적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팀들을 차례로 꺾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우리나라 대표팀도 이 마음을 보여줬다.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보여준 포르투갈전 역전골은 우리에게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줬다.

연구도 사실 게임 토너먼트나 월드컵처럼 쉽지 않다. 실험을 하다 보면 내 생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처음에는 근사한 계획이 있다. 우선 이전의 경험들을 토대로 사고 실험을 진행해 본다. 결과를 예상하고 이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실험 세트를 준비한다. 복잡한 소자는 반도체 실험실에서 짧게는 3일, 길게는 3주 정도 제작을 진행한다. 완성된 웨이퍼를 가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음 바쁘게 측정실로 향한다. 측정을 진행해 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고 서둘러 다음 웨이퍼를 통에서 꺼내 다시 측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똑같다.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느낌이 떠올라 힘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꺾인다. 내 마음은 아까 그 프로게이머나 손흥민 선수처럼 강하지 않은 것이다. 꺾여는 있지만 그래도 다시 세워보려고 애를 쓴다. 세우는 데는 몇 가지들이 도움을 준다. 우선은 책임감이다. 그 근원은 물론 나에게 주어진 임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게 주어진 개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동료들에 누가 될 수도 있다. ‘국가 과학기술 개발에 이바지하자’ 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도 마음 한 켠에 작게 자리잡고 있는 양심이 다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호기심 내지는 실험하는 재미이다. 사실 이게 더 큰 것 같은데 너무 낯간지러워서 두번째로 미뤘다. 여기에는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어나는 성공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그래프, 생각한 대로 주르륵 나온 실험 결과들이 특히 그렇다. 여러 단계를 막힘 없이 깨끗하게 만들어진 웨이퍼를 들고 불빛에 이리 비춰 보고 저리 비춰 보면서 꽤 잘 만들었네 하면서 흡족해한다. 이런 기억들이 실험할 의지를 다시 살려준다.

끝으로 하나 더 꼽아보자면 자존심 내지는 경쟁의식이다. 나도 나를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으리으리한 논문을 써서 저명한 학술지에 내고 싶은 것은 아주 기본적인 욕망이다. 똘똘한 소자를 개발해서 과제원에게 보여주며 자랑할 때도 쾌감이 있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해외 그룹이 좋은 저널에 논문을 쓰면 까 내린다. 별것도 아닌데 좋은데 잘 실었네 하면서 정신 승리를 해본다. 나도 저 정도 수준이라면 ‘혹시?’ 하면서 여태까지의 결과들을 한번 정리해 보면서 투고해 볼 만한가? 재어본다. 이내 구멍이 많음을 느끼고 파일을 닫는다.

내 마음은 연약해 쉬이 꺾인다. 그래도 동료들과 커피 한잔하면서 실험 참 뭐 같다며 털어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 너도 나랑 비슷하게 고생하고 실패하는 구나"라고 자조 섞인 대화 속에 웃는다. 초등학생 아들은 "아빠 이걸로 늘어나는 핸드폰도 만들 수 있어?", "와 아빠 대단하네"라면서 치켜세워 준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도 주위 사람들의 위로와 응원이 내 꺾인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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