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수필가(문학심리상담사)

자동차 계기판에 주유 경고등이 깜빡인다. 이천 톨게이트 진입 직전이다. 주유 계기판의 막대는 0의 경계선 위에 있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 가려면 빠듯한 시간이니 난감하다. 순간 ‘설마’라는 단어가 나를 유혹한다.

수업이 끝나고 청주로 내려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경고등이 다시 깜빡인다. 기름을 넣고 출발할까 망설이다가 ‘설마’ 하고 중부고속도로를 진입했다. 운전대 앞 계기판은 나를 향해 빨간 눈알을 깜빡거렸다.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첫 휴게소인 ‘음성휴게소까지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속도를 냈다.

얼마 후 자동차가 서서히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도 속도는 점점 떨어졌다. 자동차가 기력이 다하고 있었다. 우선 뒤에서 벌떼같이 질주하며 달려오는 차를 피해 갓길로 차선을 변경했다.

‘주여, 제발 이 마지막 남은 휘발유로 음성 휴게소까지만 진입만 하게 하소서.’

다행히 음성휴게소 진입로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깜빡이를 넣고 주유소로 달렸다. 그런데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주유소가 공사로 문을 닫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자동차 보험사에 긴급출동을 의뢰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자동차는 견인차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레커차 조수석에 앉은 나는 민망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고도 고장도 아닌, 기름을 제때 넣지 않아 생긴 일이니 말이다.

일상에서 ‘설마’가 남긴 교훈은 한둘이 아니다. 수많은 청소년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 외에도 노동 현장에서, 화재 발생으로, 홍수에 대비하지 않아서, 산에 무심코 던진 담뱃불 등. ‘설마’가 낳은 인재는 수없이 많다. ‘설마’라는 두 음절을 무한 신뢰하는 우리의 근성 때문이다.

늦잠을 잤다. 가방을 허둥지둥 챙겨 집을 나선다. ‘어!’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나? ‘설마’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설마 증후군이다. 설마가 정말이 되었다. 핸드폰은 얌전히 집을 지켰다. 온종일 불통의 하루였다. 약속 시간이 빠듯하게 출발한 적이 있다. 앞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흐름을 따라 달렸다. 사거리를 통과할 무렵 황색 불로 바뀌었다.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설마’ 하고 달리던 속도 그대로 진입했다. 며칠이 지났다. 우편함에 경찰서에서 보낸 신호 위반 고지서가 와 있었다. 벌점에 범칙금까지 냈다. ‘설마’의 늪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진 나다. 그래서일까 ‘설마’ 증후군이 단단히 몸에 배어 있다. ‘설마’는 우연이 일어날 상황의 확률을 축소해서 정당화시킨 오류다. 눈앞에 닥친 큰 문제들 앞에 사소한 일들은 지나치게 되고 무관심하다. ‘설마’는 불감증이다. ‘설마’는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그리고 타인의 삶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무서운 존재임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설마’의 유혹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이다. ‘설마’의 전제가 바늘구멍 같은 확률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일어날 상황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비무환은 아닐지라도 뻔히 일어날 일에 무관심하지는 말아야지,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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