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한 ETRI 언어지능연구실 연구원

모든 시작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로운 시작이 싹튼다. 생명이 진화해온 방식을 설명하는 이 원리는 연구가 시작되고, 연구가 다음 연구로 이어지는 기술개발 과정까지도 담아낸다. 현재의 연구가 미래 연구과제를 시작하고 수행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의 기술 발전을 위해 지금 우리가 수행 중인 연구의 시작과 끝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구과제의 시작 단계에서 연구자는 제안한 과제의 연구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 평가 방법과 연차별 목표 수치를 수립한다. 대부분의 과제에서는 평가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과거 선행 연구에 근거한 평가 방법과 목표가 수립된다. 필자는 여기서 큰 괴리감을 느낀다. 최근 기획 중인 과제들은 굉장히 도전적인 목표를 지향하며 어떠한 선행 연구도 이 목표를 정확히 담고 있지 않다. 특히나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인공지능(AI) 분야의 경우, 점차 기술적으로 더 어렵고 모호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술의 평가 방법 자체가 연구 분야로 변모하는 실정이다. 선행 연구의 평가 방법은 어디까지나 보조 도구로써 활용돼야 하며 이를 연구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지표로 삼는 순간 아무리 도전적인 목표를 가진 과제라도 과거의 연구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과제 시작 단계에서 타당성을 위해 선행 연구 기반으로 수립한 평가 방법과 정량적 목표 수치가 연구의 도전성과 활용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필자는 특히, 연구과제의 마무리 단계에서 수행한 연구의 성과만을 보이는 것을 경계한다. 성과에 초점을 맞춘 연구의 끝은 앞으로의 연구를 더욱 과장되게 하며 실제 연구 성공률은 99%에 육박하지만, 대부분의 연구 결과가 상용화되지 못하는 ‘모래 위에 선 누각’과 같은 연구 생태계를 초래할 수 있다. 과제의 성공적인 열매보다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겪은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해결할 수 없었거나 인지했음에도 미처 다루지 못했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다음 연구를 싹틔우는 데 필요한 씨앗이 될 것이다. 모든 연구는 한계를 갖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제성과에 집중하기보다 수행한 연구의 한계점에 대해 토의하고 향후 연구 방향을 도출하며 연구를 마무리하는 문화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물음에 답한 말이다. 훌륭한 지식과 통찰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이전에 쌓아 올린 연구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존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혀왔고, 이제는 초격차 과학 기술들을 선도하는 위치를 향해 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연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어놓고 단편적으로 끝나는 연구보다 평가조차 어려운 목표에 도전해 결국 한계점을 가지더라도 충분한 고찰을 통해 다음 연구의 자양분이 되는 연구가 우리에게 더 가치 있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필자는 우리들의 연구가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됐을 때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인’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의 연구가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필자의 고찰이 누군가에게는 통찰이 돼 우리나라 인공지능 기술이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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