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품위가 무엇이랴. 당의 자락이 펄럭이며 흙바람을 일으킨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도 뒤를 따른다. 흙바람을 잠재우던 비바람이 한순간 피바람으로 몰아칠 기세다. 지엄한 중전의 자리는 걸음새부터 품위를 지켜야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녀의 다급함과는 달리 왕자들은 천하태평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일을 허투루 여기랴. 드라마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자식을 키우고 지켜내는 어미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한다. 왕비라 하여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민초의 어미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어쩌면 백성의 삶보다 더 가혹하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삶이지 싶다. 왕권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자식을 지키고자 외롭게 사투하는 어미의 마음을 다룬 ‘슈룹’이다.

슈룹은 비를 막아주는 우산의 옛말이다. ‘슈룹이 비를 막아주어 우산 밖 빗줄기(세파)를 살피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세차고 차가운 빗줄기를 맞아 피부가 얼고 터지고 갈라지는 고통이 곧 삶이지 않으랴. 추운 날씨에 고뿔에 걸리고 열병도 앓아야 면역력이 생긴다. 또한, 내리는 비의 강약에 따라 슈룹을 선택할 안목도 생기리라.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 두 아이를 키우며 수시로 ‘내가 낳은 두 녀석이 성향도 외모도 어쩜 저리 다를까’라는 생각에 놀라곤 했다. 큰 사고 없이 자란 두 녀석이지만, 돌아보니 그도 수월하지 않았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에 나에 슈룹은 작고 한없이 미약했다. 아이들은 슈룹이라는 보호막 없이 세상의 풍파, 빗줄기와 마주했다. 어미로서 슈룹이 되어주지 못해 자책하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녀가 비 내리는 밤 초가마당에 무릎을 꿇는다. 체면도 옷도 주저 없이 진흙탕에 내던진다. 아니 그것들이 무슨 대수이랴. 자식의 목숨 줄 앞에서 어미는 두렵다고 뒷걸음칠 수도 슬프다고 소리 내 울 수도 없다. 더구나 어미는 자식 앞에 두려움을 내색할 수도 없다. 왕비는 내리는 빗줄기에 자기 어깨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어린 왕자에게 우산을 받치고 걷는다. 그 모습에서 세상 모든 공격은 어미가 다 막아주리라는 강한 모정이 전해진다. 그녀의 간절함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인한 어머니의 마음, 바로 슈룹이 아니랴.

내가 오래도록 사용한 우산은 이제 낡고 헤어져 추레하다. 내 모습도 삶의 비바람을 막느라 저 헤어진 우산과 닮아있으리라. 다만, 나의 품에 있던 아이들은 자생의 힘을 길러 스스로 넓고 탄탄한 슈룹이 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아니 아이들은 이미 저들만의 슈룹을 품고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조용히 일어나 문간에 놓인 슈룹을 곱게 말아 선반에 올려둔다. 내일을 위한 유비무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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