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눈을 뜨니 작은 창가에 놓인 화병의 하얀 꽃 한 줌이 새 아침을 환히 밝히고 있다. 수확 시기를 놓친 억센 부추를 버릴까 하다 망울진 꽃대 몇 줄기가 보이길래 잠들기 전에 심심소일로 한 줌 집어 화병에 꽂았었다. 꽃이라 하기엔 너무 허접하고 가냘픈데다가 음식 재료로서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 치부했던 부추에서 이렇듯 애잔하고 오묘한 끌림이 있을 줄 진정 몰랐다. 어젯밤 화병에 꽂을 때만 해도 힘없이 축축 늘어지던 대궁이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목을 세우고 탄성처럼 꽃망울을 터트린 자태가 가히 경이롭다.

멀찍이 서서 바라보다가 다가와 보니 작은 송이마다 소소하지만 저마다의 영롱한 빛을 뿜어낸다. 알싸하고 매캐한 부추 향내 또한 괜찮다. 여느 꽃내음처럼 감미롭게 향기롭거나 그윽하진 않아도 진하지 않은 향이 풀밭에 온 것 같아 그리 싫지 않다. 부추꽃을 보고 어느 작가는 하늘에 떠 있던 별이 어느 날 지상으로 내려와 꽃으로 피어났다고 표현했으니 그 감성과 눈썰미를 칭송할만하다.

언제부터인가 여럿이 강의를 듣는 자리가 생기면 지정석이 정해지지 않는 한은 앞쪽을 선택하여 앉는다. 목적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앞줄을 택한 데는 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정신일도 하겠다는 일종의 신념이다. 내 안에서 요동치던 지식의 갈증을 그 자리를 빌어 조금이나마 채워지길 갈구하는 마음이 매번 앞자리로 이끌고 있다. 하지만 앞줄을 고수하는 것은 초집중하고자 하는 나의 소소한 갈망일 뿐 사리사욕은 결코 아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는 더더욱 제단(祭壇)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는다. 아직도 신심이 돈독하지 못한 여린 신자로서 미사 드리는 내내 분심 들지 않고 오롯하게 복음 말씀을 가슴에 촘촘히 담아 성령이 함께하길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느 곳에 자리하느냐에 따라 보는 이의 시각도, 존재의 가치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 집 아침을 밝힌 부추 한 줌이 채마밭 한 귀퉁이에서 잡초와 뒤섞여 소담한 꽃을 피웠다 한들 무모한 나의 식견은 그냥 들풀 정도로밖에 여기질 않았을 것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허튼 편견이 얼마나 허점투성이고 오만이었는지 새삼 돌아보게 한다.

보아달라며 재촉하지도, 앞자리에 앉으려 서두르지도 않는 들풀처럼 때가 되면 스스로 피어나 향기를 내고 말없이 지는 품성이 존경스럽다. 어느 자리에 있다 한들 진실한 내면의 진가를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분별력이 내 안에 있다면 어느 위치의 자리인들 더 탐낼까. 지극히 평범하여 그리 눈에 띄지도 않던 생경한 부추꽃 몇 송이를 집 안으로 들여와 풋풋한 아침을 감탄하는 내게도 편견 없이 고물과 보물을 구별할 줄 아는 아량과 혜안이 먼저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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