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진 ETRI RF/전력부품연구실 기술실무원

약 11년 전 필자는 반도체 화합물 실험실 담당으로 연구원에 입사했다. 당시 업무는 공정 비용 단가를 정산하거나 화학약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필자에게는 반도체 팹(실험실)에서 모든 것들이 생소하던 시기였다.

다행스럽게도 업무를 하다보니 반도체 관련 전문 용어와 반도체 제작과정들을 접하며 반도체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고 점점 익숙해져 갔다. 반도체 제작업무를 이해하기 위해 어깨너머로 공부를 하다 보니 몇 번의 기회도 찾아왔다. 이로 인해 연구개발업무에 본격 참여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연구개발자로서 첫 업무는 무선주파수(RF) 전력증폭 소자를 측정하는 업무였다. 연구 보조 업무였지만 비전공자인 필자가 따라가기에는 관련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늘날 필자가 있기까지 소중하고 고마운 분이 몇 분 계신다. 부족한 필자를 깨우쳐 주시고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나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특히 필자를 데리고 업무시간이 끝난 후 빈 회의실에서 실무 강의를 해주신 박사님이 계시다. ‘반도체란 무엇인가’부터 공부를 시작하게 해주신 분이다. 필자 인생의 대 선배님이시다. 박사님은 가르쳐주신 파트에 대해 강의가 끝나면 쪽지시험을 보고 피드백까지 해주셨다. 지나고 보니 정말 어려운 일을 해주셨다.

가장 중요한 첫 단추를 잘 끼워주신 덕분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업무의 전문성을 넓혀가는 계기가 됐다. 그 후 필자는 약 5년 동안 반도체 측정 파트를 담당하며 연구개발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됐다. 필자에게 반도체 실험실에서 첫 번째 부여된 임무는 제작된 칩들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반도체 웨이퍼 한 장에 있는 수백, 수천 개의 칩들을 실험하고 측정하면서 경향을 분석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실험과 측정 결과로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반도체의 문제점을 미리 찾아낸다는게 꼭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일은 누가 하더라도 소중하고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반도체의 수율 및 신뢰성 측면까지 업무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얼마 전 필자가 속한 RF/전력부품연구실에서는 아주 큰 성과를 내었다. 세계적 수준의 S-대역 300W급 질화갈륨(GaN) 전력 소자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해당 기술은 미국과 일본만 개발해 보유하고 있는 군용전투기 핵심 기술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국방분야 국산화의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가 클 것으로 보인다. 내용 중에는 설계부터 공정과 측정, 패키징까지 우리 연구진에 의해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것이 부각 됐다. 그중 한 분야에 필자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고 기쁘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30여년 넘게 실험실에서 꾸준히 노력하신 선배 연구진과 연구 노하우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구진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운이 좋았으며 연구팀에 몸담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최근 기술개발과 연구성과에 따라 국내·외 전시회와 여러 기관과 업무협력 하는 일도 많아졌다. 그때마다 처음 품었던 생각을 하며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느려도 꾸준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실속이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맥주광고에도 나온 "기다림을 알아야 더 좋은 것이 온다"라는 말을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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