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장소다. 유동인구 많은 도시 대로변에 있어야 할 시설이다. 최근 고소한 빵과 쌉싸름한 커피를 즐기고자 자주 찻집을 찾는다. 식사하고 맥주집으로 향하던 발길이 자연스럽게 찻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오늘 찾는 찻집은 그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각이다.

장소를 듣고는 뜨악하다. 함께 한 지인들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향한다. 작은 하루살이도 기겁한다는 동행자나 평소 겁이 없는 나도 그곳을 지나는 불편함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가고자 하는 커피숍은 도시 외곽이다. 그것도 공원묘지를 지나야만 한다. 문득 봉선사의 두 스님이 떠오른다.

스님과 함께 자리를 편 곳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산소였다. 자손의 손길이 잦은 듯 잔디는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두 스님께서 소풍 가자며 손수 싸 온 도시락을 들고 나의 손을 이끌었다. 스님은 준비한 음식으로 고수래하고 어서 앉으란다. 참으로 황망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스님은 영혼들의 보호도 받고 잔디도 좋으니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지 않으냐 하신다. 스님과 함께여서일까 나도 곧 편안함이 느껴졌다. 스님의 법문을 듣던 그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스님을 떠올리니 공원묘지를 지나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묘지가 아니랴. 산소의 주인도 한때는 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이생을 살던 사람이다. 요즈음은 주변에서 종종 장지를 수목장으로 했다는 말을 듣는다. 나무에는 수목장 표식을 했다고 하나 일반인의 시선에는 쉬이 보이지 않는다. 표식이 없는 장소이니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를 알 수 없다. 수목장을 지낸 나무 아래에서 소풍을 즐긴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앎과 모름의 차이가 경계의 차이일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한 선입견이다.

묘지는 곧 죽음의 표식이다. 나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를 그곳을 인간은 불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대도 나도 묘지와 연관 없이 살 자가 누가 있으랴. 효를 중요시하는 민족이기에 예부터 우리는 조상을 명당에 모시고자 했다. 작은 국토에 비해 아름다운 풍경을 대부분 산소가 차지하는 연유도 그것이 아니랴. 하니 선입견으로 경계를 만들 일이 아니다.

카페주인은 생각이 트인 사람이다. 그가 바로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 아니랴. 공동묘지 주변이라는 위치 탓에 땅은 주변과 비교해 싼 값으로 구입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선입견을 지운 덕분에 평소 소망하던 수국공원을 넓고 풍성한 장소에 조성할 수 있지 않았던가. 수국을 보고자 찾아든 이들로 마당 파라솔에 자리가 없다. 나와 동행자도 선입견 없이 이끈 지인 덕분에 달빛 아래에서 고고한 수국 향에 취해 일어설 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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