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전경. 크라우드픽
대둔산 전경. 크라우드픽

[충청투데이 이심건 기자]대둔산의 높이는 878m이다.

천여 개의 암봉이 6㎞에 걸쳐 이어져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봄 진달래와 철쭉, 가을철 바위 사이의 단풍도 좋지만 겨울 눈 덮인 바위산은 한 폭의 동양화에 비유된다.

대둔(大芚)이라는 명칭은 ‘인적이 드문 벽산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봉우리’를 의미한다.

원래 이름은 ‘한듬산’이었다.

‘듬’은 두메, 더미, 덩이, 뜸(구역)의 뜻으로 한듬산은 ‘큰 두메의 산’, ‘큰 바윗덩이의 산’을 말한다.

한듬산의 모습이 계룡산과 비슷하지만 산태극 수태극의 큰 명당자리를 계룡산에 빼앗겨 ‘한이 들었다’ 해서 ‘한듬산’이라는 유례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름을 한자화해 ‘한’은 대(大)로 고치고 ‘듬’을 이두식으로 가까운 소리가 나는 둔(芚) 또는 둔(屯) 자로 고쳐서 대둔산이 된 것이라 한다.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금산군, 전북 완주군의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이다.

3개 시군 모두 8경 중 으뜸 수준으로 지정하고 있다.

논산 8경 중 3경, 금산 8경 중 2경, 완주 8경 중 1경이다.

충남과 전북에서 각각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이기도 하다.

대둔산은 노령산맥에 속하며 최고봉인 마천대(摩天臺)를 중심으로 여러 노암(露岩)이 기암단애(奇岩斷崖)를 이루며 솟아 있고, 부근에는 오대산(五臺山)·월성봉(月城峰)·천등산(天燈山) 등이 산재한다.

유등천(柳等川)·장선천(長仙川)·벌곡천(伐谷川) 등 금강의 여러 지류에 의해 장기간 두부침식(頭部侵蝕)을 받아 곳곳에 기암괴석이 형성돼 있다.

지질은 대부분이 선캄브리아기 후기에서 고생대까지 걸쳐 있는 옥천층군(沃川層群) 및 고생대 초기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을 관입(貫入)한 석영반암(石英斑岩)으로 돼 있다.

봄에는 정상 마천대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금남정맥의 첫 번째 봉우리인 월성봉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바위와 어우러진다.

식생은 대체로 높이 600m를 경계로 그 이하에는 소나무·상수리나무·개비자나무 등이 무성하고, 그 이상에는 신갈나무·졸참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울창하다.

이 밖에도 고채목·돌양지꽃·천마 제비난초·나나벌이난초 등 각종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운무가 자욱한 대둔산. 크라우드픽
운무가 자욱한 대둔산. 크라우드픽

◆ 역사적 인물 및 사건

대둔산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산이다.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라는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대둔산 경치에 반해 무려 사흘을 둘러보고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동심 바위는 원효대사가 보고 감탄한 곳이다.

고개를 숙인 듯 기묘한 모습의 동심 바위는 원효대사를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늘에 닿을 듯 높다’라는 뜻의 정상에 해당하는 마천대 역시 원효대사가 이곳의 경치에 반해 붙인 이름이다.

산 중 사찰 중 하나인 태고사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태고사는 우암 송시열이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대둔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와 권율 장군의 군대가 전투를 벌인 ‘이치 대첩’의 무대였다.

이치 대첩 이후 퇴각하던 일본군은 ‘조선의 충신과 의사를 조문한다’라는 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도 대둔산을 찾아 일본군에 대항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험한 바위 지형 탓에 접근이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천혜의 요새였을 테지만 동학군은 결국 바위 벼랑에 모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대둔산에는 ‘대둔산 동학군 최후항전지’ 표지가 있어 이런 역사를 후세에 알리고 있다.

대둔산 정상과 능선. 충남 논산시 제공
대둔산 정상과 능선. 충남 논산시 제공

◆ 문화유산

대둔산의 주요 문화유산으로는 안심사(安心寺)와 화암사(花巖寺) 등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 있다.

안심사는 1759년(영조 35)에 세운 것이나 6·25 때 소실됐고, 지금은 석종계단(石鐘戒壇)과 부도전중건비(浮屠殿重建碑)만이 남아 있다. 화암사에는 보물 제662호인 우화루(雨花樓)와 명부전·극락전·대불각 등이 있다.

충청남도 쪽에는 낙조대(落照臺)의 일몰이 장관이다. 진산의 태고사(太古寺)와 벌곡의 신고운사(新孤雲寺) 등 고찰이 있었으나 모두 6·25전쟁 때 소실됐다. 특히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元曉)가 이 절터를 발견한 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12승지(勝地) 중 하나이다.

한용운(韓龍雲)도 “태고사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승지를 논하지 말라”라고 했다. 태고사는 절 뒤에 의상봉·관음봉·문수대 등이 기묘하게 솟아 있고, 앞에는 오대산과 향로봉이 막고 있어 절경 속에 있다. 주변에는 달이 산성·성봉 산성·농성(農城) 등의 산성과 묵산리의 성터가 있다.

또 신흥리에는 삼국시대의 산성과 백제의 고분군이 있고, 신기리에는 20여 기의 고인돌군이 있다.

대둔산 삼선계단. 크라우드픽
대둔산 삼선계단. 크라우드픽

◆ 설화

1592년(조선 선조 25년) 왜군이 경상도를 짓밟았다. 왜장 고바야가와의 2만 병력이 금산과 전라도를 침범 할 때 대둔산 아래 배티재에서 광주 목사 권율 장군이 1만 5,000명의 향군을 이끌고 밤에 왜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뒀다. 그 공으로 권율 장군은 전라감사로 승진했고 뒤에는 도원수가 됐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원수권공이치대첩비(元帥權公梨峙大捷碑)'와 ‘대첩사(大捷祠)’를 고종 때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철거했다. 지금은 배티재 진산 쪽 윗문산리 언덕에 새로운 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다른 설화로는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려고 용례 산성(운주면 천등산 기슭)을 쌓고 적군과 싸웠다. 당시 대둔산 용굴의 용이 닭 우는 소리를 내고 천등산의 신이 황한 빛을 내비쳐서 견훤이 승리하게 됐다. 이때부터 '하늘의 등'이란 뜻으로 '천등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고려 말에 나라를 잃은 고려 유신이 딸 셋을 데리고 이 산에 숨었는데, 나라를 잃은 한으로 딸 셋이 흘린 눈물이 약수정(매표소 북쪽)의 샘물이 됐고, 그 딸 셋은 뒤에 바위로 변해서 신선암(삼선구름다리가 놓인 곳)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아울러 대둔산 낙조대 아래에는 태고사(금산군 진산면)가 있고 남쪽에는 829m 암봉아래 안심사(완주군 운주면)가 있다. 태고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이 절터를 찾아내고 그 절터가 좋아서 사흘을 춤추었다는 전설이 있고, 근세에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태고사의 터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승지를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택리지’에는 함열사람 손순복의 어머니 이야기가 있다. 그밖에 풍랑을 만난 어부의 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대둔산 설경. 크라우드픽

◆ 등산코스

1 코스 : 운주면 산북리 대둔산 주차장 - 매표소 - 동심 바위 - 구름다리 - 마천대 - 칠성봉 - 용문골 입구 - 주차장 (총거리 5.2km, 약 3시간 30분)

2 코스 : 용문골 입구 - 장군봉 갈림길 - 능선안부 - 마천대 (총거리 2.2km, 약 2시간)

3 코스 : 운주면 완창리 안심사 - 주능선안부 - 829봉 - 마천대 - 주차장 (총거리 2.7km, 약 4시간)

4 코스 : 대둔산호텔 - 말로온계곡 - 17번 국도 - 펜션단지 - 기당소하천 - 휴게 쉼터 - 기동마을 (총거리 3.4km, 약 1시간 20분) 

이심건 기자 beotkkot@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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