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505>

기원전 68년,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 시랑(侍郞) 정길(鄭吉)과 교우(校尉) 사마희(司馬憙)에게 서북 오랑캐 차사국(車師國)을 차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두 사람은 가을 수확이 끝난 뒤 군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차사왕은 청했으나, 흉노가 시들하게 듣고 구원군을 보내지 않는 바람에 싸우기도 전에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사태가 이처럼 전격적으로 끝나자, 흉노 진영에서는 그제서야 소동이 일어났다.

"아니, 차사왕이 그처럼 간단히 항복해버릴 줄이야!"

"차사국은 땅이 비욱하고, 우리와 인접해 있다. 그들이 한나라에 완전히 붙어 버리면 필연적으로 우리와 원수가 될 판이니, 더 늦기 전에 토벌해서 손아귀에 넣어야 해."

이렇게 방침을 정한 흉노는 강병을 동원하여 차사국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 때 한나라군은 둔전병(屯田兵) 7000명만 남고 모두 돌아갔음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정길은 하는 수 없이 그 둔전병을 몽땅 동원하고, 거기에 차사군까지 더하여 흉노군에 맞섰다. 그러나, 병력 부족에다 흉노가 원래 사납고 날랜 기병(騎兵)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었다. 마침내 적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정길은 급히 조정에 파발을 띄워 구원군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구원군을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후장군(後將軍) 조충국(趙充國) 등 주로 무관들은 출병을 주장하는 반면, 문관들은 반대했다. 특히 승상(丞相)인 위상(魏相)은 출병 반대론의 앞장에 서서 황제에게 간했다.

"큰 나라가 외국에 함부로 위무(威武)를 과시하는 것을 교병이라 하는데, ‘교병은 반드시 패하고 맙니다(교병필패:驕兵必敗), 지금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불가합니다."

다른 대신들도 여기에 적극 동조함으로써 결국 증병 계획은 유보됐고, 정길과 그의 부하들은 할 수 없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우리들도 업무를 추진할 때 어떻게 추진해야 되는지를 판단해 실행해 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 및 전각심사위원장·청곡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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