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요란한 새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비 내린 새뜻한 초목들 사이로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본다. 벚나무 가지를 타고 작은 새 두 마리가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나의 단잠을 깨운 범인들이다. 그 소리뿐이 아니다.

여느 날보다 오늘은 매미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다. 며칠을 살고자, 아니 한 번의 짝짓기를 하고자 긴 시간 침묵한 한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목청껏 울어댄다. 곤충의 소리는 종족 보존을 향한 구애의 소리라고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간절함의 소리란다. 하지만, 온몸으로 된더위를 이기는 할머니에게 곤충의 간절함을 이야기했다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지 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어찌 그 속내를 모른다고 할머니를 손가락질할 수 있으랴. 곤충의 소리는 일찍이 소음의 경계를 넘었다.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를 향해 냅다 소리친다. ‘아휴 시끄러워’.

초등학교 교과서 영향도 있다. 엉뚱한 소리가 아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부지런한 개미와 달리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의 나태함을 꼬집은 이야기가 아니랴. 우리는 한낱 곤충이 노래만 부르며 노닐어 밉상이라는 생각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에게도 연좌제를 묻는 것이리라. 하지만, 베짱이는 한여름, 길어야 가을까지 생존한다. 그런 연유로 종족 번식은 여름 한 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찌 목소리를 높여 짝을 유혹하지 않으랴. 매미도 베짱이도 여름 한 철은 꿈꾸는 우화의 계절이다. 그 속내를 짐작하니 소음으로만 들리던 소리가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간절함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수풀 속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도 이생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생이지 않으랴. 그래서일까. 종종 자기의 삶을 지키려는 아니 지킨다는 생각인 듯 쌍심지를 켠 채 포효하는 모습과 마주한다. 공동체 사회에 적응되지 않은 왜곡된 이가 적지 않다. 인간도 어지러운 세상, 삶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의 간절한 몸짓이 아니랴.

인간의 언어, 아니 곤충의 몸짓과 소리에도 그만의 속내가 담겨있다. 소중한 연인, 가족도 마음속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면, 금세 소원해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속내를 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더 큰 상처를 주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곤충의 종족 번식을 향한 몸짓을 게으른 나태함으로 왜곡함은 동화 탓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서로의 속내를 읽지 못하여 왜곡된 상황은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소중한 이들의 몸짓과 소리에 민감하다. 아니 무심한 듯 그 속내를 살피려고 애쓴다. 조용해진 나무 쪽을 살펴보니 새가 서로의 부리와 날개를 부비며 노닐고 있다. 주변도 조용해진 걸 보니 두 마리 새는 서로의 속내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 너희가 나보다 낫구나’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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