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헌 ETRI 홍보실 행정원

고등학생 시절, 필자는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해외여행의 설렘은커녕, 학생들은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왜 하필 중국이냐는 것이 이유였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웃나라 대국(大國)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고교생 사이에서 중국이란 나라의 이미지는 그 당시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2019년, 중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사에 또다시 한 획을 그었다. 물론 오롯이 중국의 탓으로 돌리기는 무리겠지만, 5억 7000만명이 확진됐고 그중 640만명이 희생됐다. 코로나로 인해 기존 경제는 급격하게 비대면화, 무인화, 자동화되기 시작했다. 온라인 디지털 전환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수단이자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시대의 급류가 됐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미·EU-러·중 간 신냉전 대립 구도가 형성되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경제는 안전궤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중국은 글로벌 복합위기를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필두로 5세대(5G) 이동통신,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등 핵심 디지털 인프라 및 거대 자본·노동력을 앞세워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하려 한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G1에 도전한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실제 중국은 2020년 AI 분야 논문 인용 수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AI 전문인력에 있어서도 대학 한곳의 특정 분야 인력이 우리나라 국립연구소 인력보다 많기도 하다.

중국의 선전에도 불구, 여전히 AI 선도국 지위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시스템반도체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전 세계 50% 이상의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디지털 주도권을 꽉 쥐고 있다. 이렇듯 세계무대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를 헤쳐나가는 중심에 ‘초격차 기술’이 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목숨 걸고’라는 한마디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수반되는 한이 있어도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국산기술 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말이다.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 이후 우리는 하나된 힘으로 똘똘 뭉쳐 소재·부품·장비 관련 기술을 자립화 기회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에 안주하지 말고 초격차 국산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해야 할 때다.

우리나라 기술 역량은 여러 신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필자가 재직 중인 ETRI도 초격차 기술 확보에 온 힘을 보태고 있다.

8월 발사 예정인 대한민국 최초의 달 궤도선 ‘다누리’에는 ETRI 우주인터넷 탑재체가 실린다. 지구의 통신망처럼 우주 공간의 다양한 장치를 서로 연결하는 우주통신의 핵심기술이다. 이 기술시험에 성공하면 우리는 세계최초로 달에서 지구로 통신하는 나라가 되고 글로벌 주도권을 갖게 된다.

또, 연구진이 개발한 인공지능 반도체 ‘알데바란(AB9)’은 차세대 AI 두뇌다. 세계 최고라고 알려진 엔비디아의 GPU보다 뛰어난 성능과 전력효율을 자랑한다. AI, 딥러닝 등에 특화된 프로세서로 스마트폰, 자율주행차, 데이터센터 등 활용범위가 무궁무진해 초격차 실현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산업과 ICT의 융합이 가속화되면서 데이터 홍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통신 인프라 기술의 조기 선점도 빼놓을 수 없다. ETRI는 6세대(6G) 통신 핵심기술 개발사업의 주관기관으로 범국가적 네트워크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 데이터를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돼야 새롭게 열릴 지능화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

글로벌 복합위기와 패권경쟁은 세계시장의 스태그플레이션 등으로 날로 경기를 얼어붙게 만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초격차 신기술’로 글로벌 패권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길 바란다. 과학기술계가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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