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산 전경.  충남 군산군 제공
선대산 전경. 충남 군산군 제공

[충청투데이 이심건 기자]충남도 남동부의 금강분지를 둘러싸고 금산고원에 속해 있는 서대산.

서대산 높이는 905.3m로 노령산맥을 이루는 정수이자 충남도의 최고봉이다.

산세가 온후하면서도 웅장하고 용바위·신선바위·장군바위·마당바위·노적봉·서대폭포 등의 경치가 좋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꼭대기는 대전 시가와 옥천·금산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제공한다. 산세가 원뿔형이어서 암벽등반을 즐기는 산악인이 많이 찾는다.

서대산의 ‘서’는 서쪽이라는 뜻이 아닌 크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대’는 군인이 집결해 있는 군영이라는 뜻과 망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금산군 금산읍 지역에서 보면 마치 망루처럼 보이고 제원면이나 대전 방향에서 보면 성처럼 보이는 산이 서대산이다.

서대산의 유래는 서쪽에 돈대처럼 서 있는 높은 산이 아니라 ‘높고 실현 같은 덤이 산’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설(살)덤산-설덤이-설더미-설대미가 되며 결국 서대산으로 관념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서대산을 배경으로 하는 마을인 서대와 성덕 이름 또한 높고 신령스러운 덤이 산을 각자 다르게 한자를 빌려 표기됐지만, 이 두 마을의 유래도 서대산처럼 하는 것이다.

현재 서대산의 골짜기와 고개에는 생명을 뜻하는 ‘살’ 계열의 지명이 많이 산재하고 있다.

서대리에는 서대리의 유래가 되는 ‘사태골, 진산태골’이 있고 조정리와 경계가 되는 ‘대술이봉’이 있다.

성당리에는 ‘개살골, 사목치’와 성당리라는 마을 이름이 있고 보광리에는 ‘서리목, 쌀개목’ 등이 유래를 모르거나 서대산처럼 다른 유래로 전승되고 있다.

우리말 ‘살’이란 뜻은 생명을 뜻하는 ‘삳’에서 유례하고 있다.

즉 삳-살(설)로 변한 말로 ‘설(살)’은 원래 생명의 원천을 뜻하고 설, 솔, 술로 변했다. ‘살’은 다시 선, 성이 되고 뜻은 수리, 시리, 소리, 솔 등이 되고 음으로는 설, 상 등으로 변했으며 이러한 예로 아직도 남아있는 산으로 서술산, 설악산, 설봉산 등이 있고 금강산의 옛 이름인 상악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또 우리말 ‘덤’은 땅을 뜻하는 ‘달’에 유래를 두고 변해 평지보다 높게 둘러 있는 곳을 이르고 있다.

서대산 북두칠성 바위. 충남 금산군 제공
서대산 북두칠성 바위. 충남 금산군 제공

◆ 역사적 인물 및 사건

마한의 왕이 천제를 모셨다는 것과 원산성이 마한의 마지막 성으로 기록된 사실의 존재를 통해 원산성과 서대산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건국 설화인 환웅 신화에 보면 마한의 왕이 남방을 순시하면서 월출산, 지리산, 덕유산 등에 산제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서대산이 당시 마한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일제 강점기 3·1운동 시기에 서대산에서 올린 성화 불의 존재 기록이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 이곳에서 올린 성화 불로 각 읍면 마을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금산군지에 나타난 서대산 봉화 기록에 의하면 금산읍에서 3월 23일 만세운동의 다음 장날인 3월 28일에도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지난 장날 만세운동에 비춰 이른 아침부터 헌병들의 경계가 펼쳐졌으며 이날은 군수 및 친일 관리 인사들까지 동원돼 민중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물론 노점과 행상까지 철시한 가운데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개시했다.

오후 10시경에는 서대산에 봉화가 오르자 읍내는 물론 군내 각 마을에서도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밤이 깊어가고 각 처에서 함께 만세 시위가 전개되다 보니 일제 헌병들도 어찌할지를 모르다 이튿날인 3월 29일 금산면의 김현재, 한철종, 김봉준, 정해준 등 20여 명을 체포했다.

위의 기록을 통해 서대산이 지닌 당시 금산 사람들의 상징을 엿볼 수 있다.

서대산 신선바위와 전경. 사진=이심건 기자
서대산 신선바위와 전경. 사진=이심건 기자

◆ 문화유산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 33-1에 있는 서대사는 전통 사찰 제60호다.

관음봉 아래에 있는 절로, 신라 문성왕 13년(851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명조 6년(1550년) 풍수학에 조예가 깊은 남사고가 중수했다고 전해온다.

선조 25년(1591) 고경명 선생의 제봉집 5권에 금천사에서 휴양 중에 서대사에 오르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내용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락’의 금산군 조에는 ‘옛날에는 상·중·하 세 개의 서대사가 있었는데 중 서대사는 지금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가람고’에는 ‘군에서 동쪽으로 40리 지점에 서대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후반까지 사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김만덕화 보살이 서대사터에 원흥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건했다고 전하며 2004년 금산군청에서 개보수해 본래의 서대사로 절 이름을 변경했다.

현재 서대사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중 ‘취운당대사’의 부도가 있다.

취운당대사는 조선 선조 22년(1588년)에 서산대사와 함께 숭인장로의 문하로 있었으며 효종 2년(1650년) 77세에 서대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서대사에서 출판했던 ‘화엄경’이 국내의 여러 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대사는 규모가 크고 불사도 활발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개덕사는 신라 문성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기도해 득도한 곳으로 옛날 서대산에 상·중·하 3곳의 서대사가 있었는데 조선말 동학의 난 및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폐사됐다고 한다.

이중 상서대사는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지금의 직녀직금대 자리이며 중서대사가 이곳 개덕사 자리이고 하서대사터는 지금의 서대사 자리로 보고 있다.

이곳 중서대사는 성심사로 불리다가 1947년 정대신행 보살이 개덕사라는 이름으로 재창했다고 한다.

서대산 정상석. 사진=이심건 기자
서대산 정상석. 사진=이심건 기자

◆ 설화

서대산 장군바위는 ‘견우탄금대’라고도 불리며 견우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견우탄금대는 고스락 동쪽 가까이 주능선에 있으며 능선 위 불룩 솟아오른 바윗덩이가 대전시와 금산 일대가 조망되게 솟아있다.

견우탄금대는 그 자체로 사방이 높은 바위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지만 위가 판판하고 넓어 시원하고 조망이 좋다.

견우탄금대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조 세종대의 난계 박연이 공부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장군바위 혹은 장군봉이라고 불리는 이 암봉의 다른이름이 바로 견우장연대인데 예전의 지명은 견우탄금대로, 이렇게 떨어진 두 곳에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있다고 한다.

견우는 탄금대에서 1년 내내 직녀를 생각하며 거문고를 탔으면 직녀는 직금대에서 견우를 그리워하며 옷감을 짜다 1년에 한 번 칠월 칙석 날 서대산 정상에서 만났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직녀직금대는 서대산 고스락의 서쪽 바로 아래에 있고 산 서쪽 머리 부분으로 위와 아래가 깎아지른 큰 바위 벼랑 그 사이에 선반처럼 된 평지가 있다.

거기에 굴도 있고 샘도 있으며 채소를 가꾸는 작은 밭도 있었다.

이 샘의 영수를 7번 이상 마시면 아름다운 미녀가 돼 혼인길이 열리고 첫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전해지는 구담에의하면 탄금대에서 직녀를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타는 견우, 직금대에서 옷감을 짜는 직녀가 칠월칠석날 서대산 정상에서 만난다는 곳이라 해 직녀직금대라 불린다.

서대산 개덕사. 사진=이심건 기자
서대산 개덕사. 사진=이심건 기자

◆ 추천코스

1코스(대표코스) : 서대산드림리조트주차장 - 용바위 - 마당바위 - 신선바위 - 구름다리 - 장군바위 - 정 - 법당안골 - 개덕사 - 서대산레저타운 (약7km, 5시간)

2코스 : 서대사(구 원흥사) - 옥녀탄금대 - 정상 - 석문 - 장연대 - 북두칠성바위 - 남근바위 - 선바위 - 용굴 - 드림리조트주차장 (8km, 4시간 소요)

3코스 : 성당리입구 - 성당리 - 재말재 - 546봉 - 정상 - 개덕사 - 성당리 - 성다리 입구 (12.3km, 약5시간 소요)

4코스 : 개덕사 - 개덕폭포(왼쪽방향) - 재말재 - 닭벼슬봉 - 서대산(정상) - 리조트주차장 - 개덕사(약 5km, 3시간 소요)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