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업성장지원부장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일이다. 졸업식에서는 의례적으로 귀빈 축사가 한참 이어진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총동창회장님의 축사 순서가 됐다.

그분은 국회의원을 여러 번 역임한 분이셨기에 언변이 유창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셨다. ‘또 일장 연설하시겠군!’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있을 때, 연단에 오르신 그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만 남기고 금세 자리로 돌아오셨다.

"졸업생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축사보다 박수 소리가 더 긴 시간이었을 정도다. 나중에 처칠 영국 총리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을 본떠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축사가 그 연설이라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포기 금지 증후군(?)’ 환자가 돼 일생을 살아간다. 인생을 살다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우리에게 ‘포기’라는 선택 항목은 없다. 마치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할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죄다 위기의 순간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포기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공기관에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다 보면 바로 이 ‘포기 금지’라는 말의 포로가 돼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는 분들을 여럿 보게 된다.

그들은 시장과 산업환경이 급격히 변해서 제품을 판매할 시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기존에 생산하던 제품을 포기하지 못한다. 또 어떤 기업은 자신이 성공했던 경영방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머지 변화를 수용할 만한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기를 포기한다. 기업 성장의 최고의 적은 바로 과거의 성공 경험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가 보다.

이런 와중에 "포기할 줄도 알라!"라고 말하는 ‘성공’한 괴짜(?)가 등장했다. 바로 얼마 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허준이 교수이다. 그는 그동안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수학 난제를 하나도 아닌 무려 10개나 해결했다. 그런 그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성공 요인으로 꼽은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적당할 때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는 적당할 때 포기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수학 난제를 풀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시고 차근차근 한 발씩 걸어 나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조금만 더 친절 하라고."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났던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위기에 처한 기업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업에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기업 내 분위기는 얼음장 같고, 경영진은 안 그래도 위축된 구성원을 더 세차게 몰아세우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는 오간 데 없다. 여유가 없으니 포기하면 볼 수 있는 다른 해법이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허준이 교수는 바로 이 두 가지, 목표와 과정을 혼동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전진하되, 과정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포기의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했기에 대수기하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완전히 다른 수학 분야인 조합론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기존의 방법대로 조합론의 문제를 조합론으로만 접근하려 했다면 과연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위기 앞에서의 긴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적어도 기존의 성장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해결방식을 끈기 있게 찾아 나서야 한다.

끈기와 포기 사이의 긴장감과 균형. 이것이야말로 지금처럼 위기 상황에 놓인 많은 기업이 놓치고 있는 재도약을 위한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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