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연 ETRI 인력기획실 선임행정원

현대 사회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기술 발전을 통해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과학기술의 역할을 고려할 때 ‘융합’은 단연 중요한 화두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는 각 분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 미래 예측이 어려워지고 있는 추세다. 이에 많은 국내·외 미래학자들은 과학과 문화, 예술, 인문학 등의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원 간 융합연구 사업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진 과학기술인이나 이공계 인력 중에는 과학자에게 인문학 혹은 문화·예술 등의 타 분야의 소양이 왜 필요한지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것 같아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 들었던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 중 하나는 학부과정의 필수교양 수업에 해당하는 인문학(Humanities) 수업이었다. 필자가 졸업한 대학은 전공에 상관없이 타 단과대학의 수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고 기초학문에서의 생각하는 방법(Critical Thinking Skills)을 중요시하는 Liberal Arts College 이었다. 해당 수업은 서구세계의 주요한 가치들을 역사적 문맥 내에서 철학과 문학적 시각을 통해 통찰하고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엄청난 리딩 숙제와 끊임없는 토론, 보고서 작성 등으로 악명 높은 수업이었다.

필자는 이 수업을 통해 난생 처음 성경부터 단테의 신곡, 플라톤의 국가, 마키아벨리 군주론 등 다양한 영문 철학과 문학 고전을 읽었다. 비록 전공과는 하나도 관련이 없었지만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어떤 리더가 되고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하는게 바람직한지 등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는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매일 마주하는 크고 작은 딜레마와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데 길잡이가 돼 주고 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문화·예술적 시각과 역량을 지니는 것도 과학기술인에게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연구실 안에 갇히기 쉬운 과학기술인의 시야를 넓혀 연구개발 성과와 연구개발의 필요성 등을 설득력 있게 대중과 정부 등 이해관계자에게 제시하고 소통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특성상 연구과제를 제안하고 공모하는 절차를 거쳐 선정되기까지 과학기술인이 정부, 민간기업 등 이해관계자를 수없이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인이 아이디어와 연구계획을 제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인 선정 및 심사과정을 담당하는 것은 대부분 국가공무원 등 비전문가이다. 이들은 전문용어로 가득 찬 계획서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가장 설득력 있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과학기술인의 제안은 아무래도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예상 성과를 시각화하고 고객을 대상으로 이러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 내는 능력은 연차가 쌓이고 과제 책임자를 맡게 될수록 더욱 중요한 과학기술인의 역량 중 하나다.

SF영화 속에서 보던 미래사회의 모습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는 것도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올바른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대중들에게 과학성과를 선보여 인정받고 정부와 민간의 투자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과학기술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도 인문학과 문화·예술 분야의 상상력은 필요하다. 융합의 시대에 과학기술인의 상상력은 무엇을 어디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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