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한 가지만 빌어야 해요. 그것이 염원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선뜻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아이의 행동을 지켜본다. 돌탑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로는 넓적한 돌을 놓고, 위로는 작은 돌을 얹어야 한다는 이치도 깨우친 듯하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신중함이 느껴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더불어 염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절과 교회 그리고 성당에서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절집 주변에서는 불자들 아니 불자가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쌓아 올린 수많은 돌탑과 마주한다. 돌탑을 쌓는 이들은 자신이 염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으리라. 아이는 배포 좋게 대웅전 앞 뜨락에 그 자리를 잡은 것이다. 대단한 녀석이다. 돌탑 장소로 절집 마당을 택한 것도 돌을 주워 나르는 발걸음도 보통의 아이들과 사뭇 다르다. 몸짓에서 깊은 불심마저 느껴진다. 과연 아이의 ‘하나만 빌어야하는 염원’은 무엇일까. 더불어, ‘나의 염원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절집 예법을 깊이 알지 못한다. 처음 법당을 찾은 날도,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벌어졌던 날 처음 법당을 찾았다. 아니 이전에도 절집은 종종 찾았다. 불심이 있어서가 아닌 관광객으로 또는 어머니를 따라 찾은 기억이 전부이다. 하지만, 간절함에 스스로 법당을 찾아 몸을 조아린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절집 예절은 고사하고 절을 어찌 올려야 하는지도 몰랐던 때이다. 촛불도, 향도 올리지 않고 기도하던 날처럼 나의 염원이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다만, 그때 이후로 무엇인가를 얻고 이루고자 기도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더 많은 것을 염원하면, 지금의 작은 평안함이 사라질 것만 같아 마음을 내려놓는다.

어찌 살아간들 그날만 못하랴. 그래서일까. 나의 기도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전부이다. 나에게 하나만 빌어야 할 염원은 그날의 염원이지 않았으랴.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안에 도사린 욕심 많은 염원을 들킨 것이 아니랴. 아이의 말에 망부석이 된 듯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젊은 부부가 법당에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걸음의 방향으로 보아 꼬마의 부모님이시리라. 아이가 그들의 품으로 달려가 안긴다. 아이의 부모와 눈인사하고 말을 건넨다. ‘부처님은 불당이 아닌 마당에 계셨어요’ 했더니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이 커진다. 그들에게 녀석이 했던 말을 들려주니 빙그레 웃는다. 부모를 보니 아이의 품성이 어디서 왔는지 알 듯싶다.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낸다. 아마도 부처님은 꼬마의 염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느 작가의 문장처럼 ‘빌 것이 없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염원(念願)하며 천천히 절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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